
Symphony No.5 in d minor Op.47
Dmitri Shostakovich, 1906-1975
WDR Philharmonic Orchestra / Cond. Rudolf Barshai
이 교향곡은 열다섯 곡에 달하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도 높으며, 종종 그의 최고 걸작으로까지 칭송되는 작품이다.
이 곡은 의미심장한 구도와 진지하고 치열한 흐름으로 인해
곧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비견되곤 한다.
무엇보다 이 곡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가혹한 운명에 대한 저항,
투쟁을 통한 극복, 그리고 승리의 쟁취라는
베토벤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쇼스타코비치 자신도 작품의 발표에 즈음하여
작곡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이 교향곡의 주제는 인간성(인격)의 확립이다.
이 작품은 시종 서정적인 분위기로 일관하며, 나는 그 중심에 서서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체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피날레에서는 이제까지 등장한 모든 악장의 비극적 긴박함을 해결하고
밝은 인생관과 삶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 교향곡을 작곡할 즈음 쇼스타코비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미 1925년, 불과 19세의 나이에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발표한
[교향곡 제1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소련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천재 작곡가로 급부상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1930년대에 들어서자 ‘소련의 국보급 인물’로 추앙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32년,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정부가
국내의 체제 정비 강화책의 일환으로 예술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교의지침을 내리면서 이 전도 유망한 작곡가는 위기에 직면한다.
당시 소련 사회 전반을 공포로 짓눌렀던 숙청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작품들에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적’, ‘좌익편향적’이라는 낙인이 찍히자
그는 심각한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 위기를 타개하고 작곡가로서의 입지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결과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창조적 답변’이라는 명목으로
내놓은 새 작품이 바로 [교향곡 제5번]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음악으로 받아들였던 교향곡 5번 d단조는
당의 비판에 직면해 작곡가로서 위기에 몰린 그의 절충수였다.
오늘날 그의 음악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과
예술가로서의 포기할 수 없는 자의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이해되곤 한다.
어떤 음악은 전자에, 또 어떤 음악은 후자에 좀 더 가깝다.
그래서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음악에서는
갈등과 고뇌의 흔적들이 만져진다.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혹은 나아가거나 후퇴하거나의 갈림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예술가의 내면적 자아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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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작곡가가 만든 교향곡 가운데 두드러지게 연주 횟수가 많은 교향곡이다.
뭐든 제목 붙여대기 좋아하는 일본에서는 한 때 이 곡을
'혁명' 이라는 부제로 부르기도 했지만,
실제로 혁명과 연관된 키워드는 곡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37년 11월 21일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이끄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 무대를 열었는데,
물론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입지는
별로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통 교향곡 형식론과 '고통을 넘어 환희로' 라는
베토벤풍 도식을 취해 '당의 입장' 에 부합한 것으로 여겨져
초연 무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소련 언론과 공적 단체들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판도
다소 완화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출판은 1939년에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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