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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군주」 정조의 좌절 이즈음부터 정조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정조의 입에서는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거나 “나 혼자서 천 칸의 창고를 지키는 격”이라는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이를테면, ‘임금짓 못해먹겠다’는 푸념을 연발한 시기였..
■ 「개혁군주」 정조의 좌절 이듬해인 1795년(을묘년) 윤2월 9일 아침 정조는 저 유명한 ‘을묘원행(乙卯園幸)’을 단행하였다.{임금의 행차를 행행(行幸)이라 하는데, 능(陵-왕과 왕비의 무덤)이 아니라 원(園-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이었으므로 이를 원행(園幸)이라고 불..
■ 정조와 채제공 한편, 채제공 독상정부 하에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던 영남의 남인은, 정조 16년(1792년) 경상도 유학 이우 등을 앞세워 1만 57인의 연명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였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처단하는 일이야 말로 선대왕(영조)의 본심을 받드는 것이..
■ 개혁정국「환상의 복식조」 그렇다면, 김종수를 필두로 한 노론벽파는 정조의 탕평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초지일관 정조의 탕평책을 비판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탕평책이 정치원리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흐리게 할 뿐 ..
■ 「시파」와 「벽파」의 대립 한편, 가장 관심을 끄는 노론 ‘청명당’은 영조 46년 전후에 결집되었으며 김치인․정존겸․ 윤시동․유언호․홍낙성 등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강력한 정파였다. 정조가 노론세력에 대하여는 ‘생태적인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뉴(ne..
■ 「시파」와 「벽파」의 탄생 홍국영의 사망은, 한편으론 진정한 정조시대가 개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정조는 홍국영의 구상이 아니라 세손시절부터 꿈꿔 왔던 자신의 구상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상불, 즉위 초 몇 년간 정조는 모든 ..
■ 「홍국영 전성시대」- 2 ‘앓던 이’ 홍인한이 조정에서 쏙 빠지자 대리청정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조는 1776년 1월 27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그 3일 뒤인 1월 30일 대리청정 의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 3개월 뒤 영조는 사망하였다. 그야말로 ‘절묘한 ..
■ 정조 즉위 초기의 정국(政局) - 1 모르긴 몰라도, 정조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그의 별명은 필시 ‘이짱’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홈페이지는 연일 손님들로 북적거렸을 것이고, 팬클럽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짱 신드롬’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