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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창 위에 최기상, 그 위에 덕원령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승리한 자에게 대중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 환호속에 패배한 자는 모욕과 창피를 당하며 소리없이 무대 뒤로 사라진다. 승패의 명암에는 고금에 차이가 없다.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단순히 명예만의 문제가 ..
■ 빈틈 보이지 않는 명승부 정운창은 이렇게 보성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평양으로 다니며 조선 바둑계의 최고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 과정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 뒤로 정운창이 바둑계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를 두고 이..
■ 당대 고수 김종귀 꺾다 그러나 당대에는 김종귀가 최고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의 승부가 최고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하지만 정운창은 그와 대국하지 못하였다. 김종귀는 우연한 일로 평양에 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정운창이 한창 김종귀와 자웅을 겨뤄보고 싶어하던 무렵에 평양감..
■ 시골뜨기, 세상에 나오다 이제 이 글의 주인공, 시골뜨기 신출내기에서 조선 최고의 기사 반열에 오른 정운창이 살았던 삶과 시대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최근 귀중한 사료가 발굴됐다. 18세기 후반에 활약한 국수의 존재와 그들의 구체적 활동을 사실에 가..
■ 오묘한 棋理 깨우쳐 八道 호령한 진정한 프로기사 조선시대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갖고 있는 통념 하나. 양반 사대부는 독서와 정치에 몰두하며, 여자들은 집에 들어앉아 살림하고, 그들이 읽는 책은 사서삼경, 그들의 학문은 주자학뿐이며, 직업이래야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벗어나지..
■ 조선은 극단적 ‘남성 양반’ 중심체제 조선시대는 극단적 ‘남성 양반’ 중심체제였다. 남성중심주의는 일부일처제를 넘어 남성의 성욕을 충족시킬 수단을 제도화했다. 즉 축첩제와 기녀제는 남성의 성욕을 무한대로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였던 것이다. 여성의 음행을 비판하면서도..
■ 기생은 ‘공공재’…법적으론 개인소유 금지 성종 17년 10월27일에 왕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국가에서 경외(京外)에 창기소(娼妓所)를 둔 것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宴享)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듣건대 우후(虞候)·수령 및 대소 사신들이 사사로이 데려가..
■ 國喪 중에도 官妓와 성행위 국상 때는 원래 기생과 성관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말도 되지 않는 법이지만, 법이 있다고 해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록에도 국상 중에 기생과 관계하다가 처벌된 사례가 무수히 보인다. 예컨대 성종 4년 8월27일 안철손(安哲孫)은 국상(國喪) 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