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과 송시열
병자호란은 송시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이 발생하기 3년 전인 인조11년(1633)에 생원시에 급제해 대과를 볼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 생원시에 장원을 하여 그 해 10월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면했다.
그는 2년 후에 대군사부로 임명됨으로써 관직에 모습을 드러낸다. 임금의 적자인 대군을 가르치는
대군사부는 학문이 높은 인물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관직이기는 했으나 그 품계는 종9품의
미관말직에 불과했다.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사부가 정1품이고 세손을 가르치는
세손시강원의 사부가 종1품인 것과 비교해 보면 그 비중을 알 만하다. 그만큼 왕위를 이을 세자나
세손을 중요시한 것이다. 그나마 대군사부는 임시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자리도 최명길의 추천으로 얻은 자리였다.
최명길은 인조 14년 6월 차자를 올려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추천한다.
그런데 이 추천사는 송시열이 자신의 고향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송준길,송시열은 모두 김장생의 문인인데, 신은 비록 서로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사람들은 감히 멋대로 그른 짓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송시열은 이처럼 율곡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의 문인이라는 점과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유학자라는 점을 인정받아 대군사부가 되어 조정에 진출하는데, 이때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가 가르쳤던 대군인 봉림대군이었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은 훗날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는데 그가 곧 효종이다.
송시열은 봉림대군을 가르치는 대군사부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송시열의 나이는 만 28세였고 봉림대군의 나이 만 16세였다.
이 당시는 소현세자가 이미 세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이나 봉림대군 그 누구도
봉림대군이 훗날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암이
봉림대군을 가르친 기간도 불과 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훗날 당쟁이 격화하면서 우암의 당파인
서인과 노론은 두 사람의 인연을 과대포장해 송시열이 효종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강조했다.
뒤에 서술하겠지만 우암을 효종의 충성스런 신하로 포장해야 했다는 사실은 둘의 관계에
그만큼 문제가 많았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송시열은 바로 병자호란을 맞이하게 된다.
송시열은 인조의 몽진 행렬을 따라 강화도로 피하려 하였으나 청나라 군사가 길을 끊는
바람에 실패하고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봉림대군은 인조의 비빈들과 함께
미리 강화도로 피신한 터였다.
조선왕실이 남한산성과 강화도로 갈라지는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이때 강화도로 피신한 인물 중에 송시열의 동문인 미촌 윤선거란 인물이 있다.
윤선거는 그의 아들 윤증과 강화도로 피신해 살아남는데,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송시열이
훗날 이를 격렬히 비난함으로써 윤증과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회니논쟁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은 1636년 12월이었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해
일체의 보급을 끊었다. 강화도는 몽고침입 때 고려왕실이 장기간 천도해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농성의 적지지만 남한산성은 농성할 장소가 아니었다. 더구나 한겨울에 산성 꼭대기에서
농성한다는 것은 한반도의 일기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시절의 참상을 한 궁녀가 남긴 '산성일기'에서 살펴보자.
'12월24일에 큰비 내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이 다 젖고 얼어 죽은 이 많으니
상(인조)이 세자(소현)와 함께 뜰 가운데 서서 하늘에 빌어 가라사대,
"금일 이에 이르기는 우리 부자 득죄함 때문이니, 성안의 군민들이야 무슨 죄가 있으리까.
천도는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컨대 만민을 살리소서."
군신들이 안으로 드시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시더니, 오래지 않아 비 그치고
날씨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이 감읍지 않은 이 없더라.'
하늘은 이때 겨울비는 멈추어 주었는지 모르지만 청나라 군사의 포위까지 풀어준 것은 아니어서
고통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의 고립된 산중에서 45일을 버틴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고군분투였다. 산성의 인조가 믿는 유일한 희망은 구원군이었다. 하지만 다음해 1월 산성에
당도한 것은 구원군이 아니라 강화도가 함락되어 비빈들이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는비보였다.
인조는 할 수 없이 삼전도로 나와 청태종에게 삼궤구복이란 신하의 예를 취하며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향명대의의 목청 큰 서인정권의 것이 아니라 오랑캐 청나라의 것이었다.
송시열은 이 고난과 치욕의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다른 유생들처럼 척화론을 소리 높여 외치지는 않았다.
물론 종9품 미관말직으로서 척화론을 주창할 처지가 아니기는 했지만 관직이 없는 유생들도
외치던 척화론을 그는 주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 속리산 복천사에서 백호 윤휴를 만나 서로 통곡하며 약속했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
그러나 훗날 송시열은 정치를 하게 되면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선다.
이때만 해도 훗날 두 사람이 서로 죽이고 죽는 정적 관계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낙향한 송시열은 벼슬에 뜻을 잃어 더 이상 과거를 보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충격이
그마큼 컸던 것이다. 그는 향리에서 학문에만 몰두했다. 인조 17년(1639)에는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21년 12월 세자시강원의 익위사좌우익위로
삼았으나 출사를 거부했다. 이런 송시열에게 인조는 계속 관직을 재수했다. 병자호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인조로서는 산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율곡의 학통을 이은 기호유림의
계승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거듭 불렀던 것이다.
재위 22년(1644)과 23년 인조는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정5품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며
계속 불렀으나 모두 송씨라 하여 양송으로 불리던 이들은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송시열이 거듭 출사를 거부하자 그에게 제수되는 벼슬은 계속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갔다. 종9품 한직인 대군사부를 제수받았을 때도
사양하지 않고 나왔던 그가 정5품 사헌부 지평을 제수해도 거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인조실록' 23년 10월조는 "처음에 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로 벼슬길에 뜻을 끊어서, 누차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고 하여 병자호란이 직접적인 원인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출사를 거듭 거부하는 은둔정치는 그의 정치적, 학문적 위상을
높여 주었다. 과장에 사람이 구름같이 몰리던 시절에 대간 직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해도 거절한 사실은 내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수된 벼슬들을 거듭 거부하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동안
청의 수도 삼양에서는 소현세자 부처가 볼모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연세자의 볼모생활 도중의 처신은 훗날 발생할
거대한 비극적 사건을 잉태하고 있었다. 바로 예송논쟁의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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