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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부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1)
    역사이야기/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19. 4. 12. 17:45


    
    ■ 인조반정에 대한 허위 이데올로기
    
    광해군 15년(1623) 3월 전부사 김류, 이귀, 이괄,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등 
    서인들이 이끄는 6,7백여 명의 병력들이 서울 북쪽 홍제원에 모였다. 
    이들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무너뜨리려 모인 서인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추대받은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도 친병을 거느리고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가 합류해 먼저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이때 광해군은 쿠테타에 가담한 김자점이 미리 총애하는 상궁 김개시에게 보낸 
    술과 안주로 궁인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다가 쿠테타군의 급습을 받고 무력하게 무너졌다. 
    조선이 개국한 지 두 번째로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는 반정이 성공한 것인데,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부른다. 반정은 그른 것을 바른 것으로 되돌렸다는 의미지만 
    이는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쪽의 견강부회이고 
    인조반정은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간 시대착오적인 사건이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현군이었다. 
    우선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대륙 정세의 격변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조선을 전란에서 비켜가게 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광해군은 한 족의 명나라와 만주족의 후금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등거리 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냈던 것이다. 
    또한 안으로는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함으로써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으며, 
    임란 때 파괴된 농지를 복구하기 위한 양전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오로지 권력을 장악할 야심으로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끌어내리려 했다. 이들은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국익을 위한 광해군의 
    양면외교 정책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선왕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한 것은 
    불효라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군을 파견한 것은 명나라 정벌의 기치를 내걸었던 
    왜군과의 전쟁터를 한반도로 국한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한 것은 그간 왕위를 둘러싸고 왕가에서 숱하게 있어 왔던 
    불상사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대비 김씨는 선조 말엽 친정 아버지 
    김재남과 함께 자신의 소생인 영창대군에게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해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작업을 수행했으므로 일방적으로 광해군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재위 2년에 선대의 숙원이었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사림파 오현의 문묘종사를 단행했으니 
    사림의 처지에서 보아도 쫓겨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인조반정은 일어나서는 안 될 서인들의 명분없는 쿠데타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 성공 후 이들은 명나라를 향한 의리란 뜻의 향명대의, 
    또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리란 뜻의 숭명의리를 드높였다. 
    인목대비가 인조의 즉위를 허락하는 교서의 일부를 보자.
    "우리 나라가 명나라를 섬겨온 것이 200년으로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해 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어 선왕께서는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으셨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청)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그러나 명나라를 드높이느라 서쪽을 등지고 얹지도 않는 것은 선조 같은 용렬한 군주나 
    사대주의자들인 서인들뿐이었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은 인조반정에 반발하면서 
    봉기를 일으키려고까지 했다.인조반정 일등공신인 이서가 반정 직후 남긴 회고를 보자.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이 회고는 반정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회고를 계속 들어보자.
    "오리 이원익이 전 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재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영상에 제수된 이원익은 남인이었다. 국가적 이익이 아닌 당파적 이해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에 대한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자 이원익에게 영상 자리를 제시하며 
    반대당파인 남인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원익에게 제의한 자리가 다름 아닌 인신의 
    최고위직인 영상이라는 점은 이들 서인들의 쿠데타가 얼마나 명분 없는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명분 없는 반정 정권에 남인들을 관제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서인들은 훗날 남인들이 관제 야당의 테두리를 벗어나 정권을 장악하겠다고 
    나서고, 이들과 당운을 건 승부를 걸게 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광해군의 현실적인 외교 정책에 반기를 들고 정변을 일으킨 서인들은 
    반정 후 급격한 친명배청 정책으로 선회했는데, 이것은 수많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떠오르는 해인 만주족의 후금을 배격하고 지는 해인 명나라를 추종하려는 친명배청 정책을 
    무리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후금보다 군사력이 강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이상 비극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뜨는 해' 만주족이 중원에 찬란히 떠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중원으로 쳐들어간 사이 명나라와 결탁한 조선군이 만주를 공략하면 
    이른바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금은 중원에 쳐들어가기 전에 
    조선을 우호국으로 만들든지 전쟁을 통해 속국으로 만들어야 했다. 우호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인조5년의 정묘호란은 이런 연유로 발생한 것이다.
    정묘호란은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는 정묘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이었다. 
    당시 후금은 명과 조선 모두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습책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정묘조약 9년 후인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후금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나선 것은 조선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인조와 서인정권이 
    군신관계를 거부하려면 정묘조약 이후 병자년까지 9년이란 기간 동안 
    군사력을 길러야 했다. 
    하지만 서인정권은 군사력 대신에 친명반청의 명분만 쌓았다.
    드디어 인조는 8도에 후금과 싸우자는 선전교서를 내렸다. 
    조선백성보다도 '명나라를 향한 의리'를 더 큰 목소리로 주창한 이 선전교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허세뿐인 명부론에 대한 후금의 대답은 구사공격이었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인조가 삼궤구복의 예를 취해야 했던 삼전도의 치욕은 
    시대착오적인 인조반정이 낳은 귀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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