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시열의 첫 번째 스승은 아버지
송시열의 첫 번째 스승은 부친 송갑조였다.
그런데 송갑조가 어린 송시열의 학문 교재로 삼은 책은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이었으니
그의 첫 스승은 이이인 셈이다. 비단 송시열뿐만 아니라 서인계 사대부가에서는 글자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반드시 이이의 '격몽요결'을 가르쳤다. 물론 이이가 서인의 종주이기 때문이다.
'격몽요결'은 '무지몽매를 깨뜨려 버리는 데 요긴한 비결'이란 뜻으로 말하자면 어린아이 교육용
성리학 교과서이다. 율곡이 쓴 이 책의 서문을 보자.
"학문의 길에 막 들어선 이들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당혹해 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공부의 바른 길을 인도해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우암 송시열도 12세 어린 나이에 '격몽요결'을 다 읽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말씀대로 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수 없겠습니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이 어린 송시열을 그토록 매료시켰을까?
'격몽요결'의 제1장 '입지'편의 첫 구절을 보자.
"처음 배우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성인이 될 것을 약속해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이 남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에 자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
스스로 공자나 맹자, 주자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학문을 하라는 권고이니
꿈 많은 소년의 가슴을 부풀게 만드는 권고가 아닐 수 없다. 송시열은 성인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학문에 정진했다. 그는 '맹자'를 천 번 이상 읽었다고 소문난 사람이기도 했다..
맹자에 대한 그의 술회를 들어보자.
"내 나이 열네 살 때 '맹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 뜻이 쉬워 기뻐하면서
날마다 공부했다. 그런데 '호연' 장에 이르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나무 같았고 때로는 이마에 진땀이 돋기도 했으며 짜증이 나기도 했다.
열일곱 살이 되자, '글이 어렵고 쉬운 것이 아니라 나의 공력이 이르지 못한 데가 있는 것이다'
라고 탄식하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읽기를 오륙백 번이나 했는데
비록 글을 입에 쉽게 오르기는 했으니 그 의리는 종내 깨달을 수 없었다."
훗날 제자 박광일이 물었다.
"선생님은 '맹자'를 천 번이나 읽었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송시열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맹자를 천번 읽었지만 앞의 두서너 편은 일생 동안 외웠으니 몇천 번 읽었는지 알 수 없네."
물론 '논어'나 '중용', '대학'같은 다른 경전들도 매일같이 읽었음은 물론이다.
송시열이 최초의 스승 송갑조에게 배운 것은 유교 경전뿐이 아니었다.
송갑조는 그에게 역사관도 가르쳤다. 비단 송갑조뿐만 아니라 우리 선현들은 모두 문,사,철을
하나로 여기는 인생관을 갖고 있었고 이는 곧 전인을 지향하는 선비관이기도 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역사관은 사림파의 사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중종 때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림파에 관한 기록인 김정국의
'기묘록'과 허봉이 편찬한 '해동야언'을 읽게 했다.
두 권의 책은 모두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화를 당한 사화에 관한 기록이다.
수옹 송갑조는 '기묘록'과 '해동야언'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암 조광조 선생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조광조는 중종 때 훈구파에 맞서 개혁을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사형당한 사림파의 영수였으니
송시열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사림에 대한 이념 교육을 받으며 자란 셈이다.
송시열의 외고집적인 성격은 아버지의 고집스런 성격을 이어받은 점과 어린 시절의
이런 평중된 교육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사물을 폭넓게 경험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주자와 사림이라는 좁은 세계만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도록 강요당한 셈이다.
수옹은 송시열에게 한 편의 시를 지어주며 그의 좌표로 삼게 했다.
매월당 앞의 맑은 물과 매월당전수
도봉산 위의 흰구름 / 도봉산상운
매월당 김시습처럼 맑은 물의 마음과 도봉산 위의 구름처럼 높고 깨끗한 의를
추구하라는 뜻의 시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자리를 뺏은 데 분개해
출사를 거부하고 승려가 되어 한평생 세상을 등지고 산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사대부가 승려가 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아랍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인 것이다.
성리학은 스스로를 '정학'이라 부르고 여타의 학문은 '사학'으로 배척했는데
이 당시 불교는 당연히 사학이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로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심각한 자기부정이었다.
김시습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는 극단적 방법으로
세조를 부인했던 것이다.
조광조와 김시습 같은 인물들을 어린 시절부터 따라야 할 전범으로 교육받은
송시열이 평생 타인과 대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사상이나 처지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만의 절대적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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