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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부 흔들리는 주자학의 나라에서(4)
    역사이야기/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19. 4. 7. 23:15


    
    ■ 송시열의 스승들... 노비 출신이 제창한 예론
    
    비록 남인에게는 경멸을 받았지만 송시열이 서인들,, 특히 노론 사이에서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그의 학통이었다. 심지어 혈연보다도 학연을 
    더 높이는 우리 사회의 풍토는 이들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송시열의 학통은 서인 학자로서는 최고의 계통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계보는 
    그대로 정치적 계보가 된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크게 동인과 서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동인의 종주는 퇴계 이황이고 서인의 종주는 율곡 이이이다. 이황을 종주로 삼는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서애 유성룡이 남인의 종주이며, 남명 조식에서 내암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곧 북인이 된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정인홍 같은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면서 
    정권을 잡았던 북인은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 대거 사형당해 역사의 무대에서 강제로 
    퇴출되고 다시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다. 
    서인의 종주는 율곡 이이지만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사람들로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이 있다.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은 율곡에게서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축으로 하는 이기일원론의 
    도설을 주축으로 하는 이기일원론의 학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지만 사실을 말하면 이이보다는 
    송익필의 제자라고 보아야 할 인물이다. 송익필은 당대의 거유 이이, 성혼과 나란히 학문을 
    토론하던 인물로서 이이, 성혼과 노변한 것을 묶은 '현승편'을 남길 정도로 쟁쟁한 거유였다. 
    조선 성리학자 중 그 누구보다도 흥미로운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사대부에서 노비로 전락하는 
    인생 유전을 겪은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특이한 인생 유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율곡의 이기일원론에서 예학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의 스승 김장생은 조선 예학의 태두로 불리는데 그에게 예학을 가르친 인물은 이이가 
    아니라 송익필이었다.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사사한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들었으며, 
    바로 이 예학이 훗날 두 차례에 걸친 서인과 남인 사이의 '예송논쟁'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송익필이 '현승편' 이외에도 '예문답' '가례주설'등을 저술했는데, 3권으로 된 '가례주설'은 
    주자가 지은 '주자가례'에 주를 단 책이었다. '주자가례'는 주희가 부친상을 치르면서 중국 고대 
    '고례'가 미비하다는 생각에서 예학 연구를 계속해 17년 후의 모친상 때 완성한 예법책이었다. 
    김장생은 율곡에게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축으로 하는 이기일원론을 배우고 구봉에게는 예학을 배웠다.
    20세 때 율곡을 직접 사사한 김장생은 율곡과 구봉 두 스승 중에 율곡의 이기일원론을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발전시키기보다는 구봉의 예학 사상을 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장생 자신이 이이보다는 송익필의 제자임을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이이에 대한 김장생의 평가를 보자.
    "내(김장생)가 볼 때 율곡 선생의 넓은 학문은 최고의 경지이지만 
    집약하여 실천하는 에에는 부족한 바가 있어 보인다." 
    이처럼 김장생이 천하의 율곡보다도 높이 평가한 구봉 송익필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유전은 과연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방대한 양의 '주자대전'을 모두 외웠다고 알려지기도 하는 인물이자 조선 예학의 대가이다. 
    하지만 그가 예학의 대가였다는 점을 그의 인생 유전에 비추어 보면 한편의 회화가 된다. 
    그는 율곡과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주창한 예법에 따르면 노비 신분의 그가 
    사대부인 이이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둘이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날 때부터 노비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조실록' 24년 10월에 사헌부는 '사노' 송부필, 송익필 등 3형제가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일국을 교란시키며 사림을 모함하는 것을 평생의 능사로 삼고 있다며 
    추적해 체포할 것을 청하면서, "그 사정을 추궁하여 보니 그들이 본주인에게 죄를 짓고 
    온 가족이 도망 나와 권문에 의탁해 소굴로 삼은 뒤 기필코 세상을 뒤엎어서 
    옛 주인에게 보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라며 "유사에게 명하여 끝까지 수색 체포하여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라고 주청해 윤허를 받는 기록이 나온다.
    사헌부에서 송익필 형제를 '사노'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선조실록' 32년 2월조에는 송익필의 제자 정엽이 동부승지로 임명된 데 대한 비난과 함께 
    송익필의 가계가 나온다. 
    "송익필은 바로 기묘사화 때 고변한 송사련의 아들이다. 
    송사련은 남곤, 심정의 사주를 받고 선비들을 해쳤으며, 송익필은 종으로서 
    주인을 배반하여 인륜에 죄를 졌는데 정여은 무엇 때문에 스승으로 섬겼단 말인가?"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은 기묘사화 2년후인 중종 16년(1521)에 있었던 신사무옥의 고변자였다. 
    송사련은 안돈후의 여종 출신 첩 중금의 손자이자 중금이 데리고 들어온 딸 감정의 아들이었고, 
    송사련의 아버지는 송자근쇠로 안돈후의 아들인 안인의 추천으로 관상감 주부가 된 인물이었다.
    송사련 가문은 이처럼 안씨 일문의 덕을 많이 입었으나 주인댁인 안처겸 등이 남곤 등 
    대신들을  제거하려 한다고 고변하여 안씨 일문의 많은 사람에게 화를 입혔던 것이다. 
    송사련은 고변의 공으로 당상관에 올라 세력을 떨쳤으나 사후인 선조 19년(1586)에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짐에 따라 무고로 판명되었다.
    송사련의 고변이 무고로 밝혀지고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국법대로라면 그 아들 
    송익필은 노비로 환천되어야 했다. 사헌부의 주청중 "서노 송부필, 소익필 등 3형제가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라는 말은 그가 노비로 환전되지 않기 위해 
    서인 유력가의 집에 숨어 안씨 일문의 추쇄에서 벗어나려 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선조실록'32년 2월조는 "대체로 그 은미한 심술이 부정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기축옥사때 정철등의 심복이 되어 없는 죄를 만들어서 한 시대의 청류로 하여금 마침내 
    살아남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교활한 기교와 수단은 그만한 유례가 없었던 것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희천에 유배가 있으면서 정여립을 고변케 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부친의 고변이 무고로 밝혀진 이상 노비로 환천되어야 했을 송익필이 '소학'으로 
    몸을 닦고 '주자가례'를 생활화하여 사회를 예로 순화시켜야 하다고 시종일관 주장한 것은 
    조선 예학의 태두가 벌인 한판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예학이란 각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뜻하는데, 노비인 그에게 예는 
    주인을 정성껏 섬기는 일이어야 했다. 노비가 사대부의 예를 행하려 하다가는 분수를 
    벗어났다 하여 매맞아 죽어야 하는 사회가 조선사회였고, 이들이 예학을 강조한 이유 자체가 
    임진왜란 이후 거세게 일었던 백성들의 신분제 철폐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비의 신분으로 사대부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예학을 주창한 송익필과 그 수제자 김장생, 
    그리고 그 아들 신독재 김집은 조선 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바꿔놓은 세 인물이었다. 
    그리고 김장생 금집의 제자들인 송시열, 송준길에 이르러 예학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이기일원론을 주창한 율곡의 사상이 이들에 이르러 예학으로 변화한 것은 조선 성리학이 
    사회 변화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사상으로 퇴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 당파가 
    그 종주 율곡의 개혁정신을 저버리고 보수적인 정치당파로 변했음을 시사한다.
    율곡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일요한 경장의 시기라고 판단했던 
    개혁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가 '십만양병설' 및 '경제사' 창설에 대한 주장은 
    이런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시대 인식의 결과였다. 
    그는 농민들의 피땀을 쥐어짜는 공납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잡다한 공물을 쌀로 통일해 
    납부하는 '대공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암 조광조가 공납의 폐해 시정을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 율곡은 조광조의 맥을 잇는 개혁적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율곡의 학통을 이었다는 김장생과 김집, 그리고 송시열 등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든 예학은 개혁이 아니라 수구 사상이었다. 이들은 율곡 사상의 진수인 
    내적 정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껍데기 학맥만을 이은 것이다.
    예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농민은 결코 지배계급인 사대부에게 저항할 수 없다. 
    사대부는 영원한 지배계급이고 농민은 영원한 피지배계급인 것이다.
    이들이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만든 이유는 당시 그만큼 사대부 계급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더이상 사대부를 특권층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의 사회적 추세이자 역사 발전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사대부 지배체제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들은 사대부들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고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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