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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부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4)
    역사이야기/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19. 4. 16. 16:14


    
    ■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4월 청의 구왕이 이끄는 청나라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했다. 
    하루 평균 120-130리에 달하는 빠른 속도였다. 세자는 구왕이 이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북경을 청이 차지한 것은 대세가 결정되었음을 의미했다. 
    세자는 북경에서 문연각이라 불리던 명 목적의 부마 후씨 집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 일 만에 심양으로 되돌아 왔다가 그 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청나라 황제는 북경을 청의 수도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이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주 중요한 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세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다. 아담 샬은 1628년(인조6) 32번째의 예수회 신부로 
    북경에 부임해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북경 동안문 내에 거주하면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청의 세조는 
    북경 점령 후 자신의 과학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을 삼고 
    대청시헌력을 짓게 하였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무문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릿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동안문 내 아담 샬의 거주처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숙소인 문연각은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우정을 쌓았다.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와 만남은 조선에 천주교를 
    전교할 수 있는 호기였고,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서양의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머나먼 이국에서 온 푸른 눈의 손교사와 볼모로 잡혀온 남다른 처지의 
    불행한 세자는 서로에게 이색적인 감회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이 만남을 지켜봤던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에서 이 만남을 기록했다.
    "순치 원년에 조선국왕 인조의 세자는 북경에 볼몰 와서 아담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에 대해서 살펴 물었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깊이 사귀었다.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임을 
    말하였는데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며 자세히 물었다. 세자가 귀국하자 샬 신부는 
    자신이 지은 천문.산학.성교정도의 여러 서적 여지구(지구의)와 천주상을 선물로 보냈다."
    소현세자는 곧 아담 샬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그 속에서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하여 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이 '증오'와 '감사'의 차이가 이후 
    두 사람의 운명뿐만 아니라 조선의 운명을 극단으로 끌고가게 된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할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국하기 232년 전이었다. 
    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개국한 것은 이보다 211년 후였다.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이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 
    9년 간의 볼모 생활은 소현세자의 사고를 개방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샬은 신부
    대신에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송, 장삼외, 유중림, 곡풍등 같은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란 때 천주교 신자 소서행장이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1644년 11월 1일 청의 세조는 북경의 천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반포했다. 
    천하의 주인이 자신임을 선포한 것이다. 세자와 대군도 이 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 달 11일 구왕은 용골대를 시켜 말을 전했다.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이었다.
    "북경을 얻기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왕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었으니 
    지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드디어 멀고 길었던 볼모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는 이유는 구왕의 말대로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세자를 붙잡아 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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