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집스런 가풍
우리나라 위인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태몽이 우암에게 빠질 리가 없다.
그의 어머니 곽씨가 꾸었다는 명월주를 삼키는 태몽은 아주 흔한 꿈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수옹 송갑조가 꾸었다는 태몽은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면 특이하다.
송갑조의 꿈에 공자가 손수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의 처가인 구룡촌에 왔다는 것이다.
송시열의 아명이 성현인 '공자가 준 아들'이라는 뜻의 성뢰인 것이 이 때문이라고
그의 집안에서는 주장해 왔다. 자는 영보라고 했다.
생애 내내 타인과 충돌을 일으킨 그의 경직된 성품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에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시절 송갑조가 사마시에 급제했을 때의 일화는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인조 1년 5월 송갑조를 강릉 참봉으로 삼았다.
능참봉은 종9품의 미관말직이지만 그나마 이 하위직에 임명된 것도 북인정권기인 광해군 때의
행위 때문이었다. 당시 서궁에 거주하던 인목대비는 광해군 및 북인정권과 극도로 불편한 사이였다.
송갑조와 함께 합격한 이영구등이 서궁에 인사 들르지 않겠다고 상소하려 하면서 여러 유생들에게
서명을 권하자 송갑조는 "이 상소는 도대체 무슨 의리인가"라고 반대했다.
유생들이 반대자의 이름을 캐묻자 송갑조는 붓으로 이름을 크게 써서 보여주고는
혼자 서궁에 가서 인목대비에게 절했다.
이 일로 유적에서 삭제되는 유벌을 당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치다가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이 쫓겨나고 서인들이 득세하면서 능참봉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별다른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것을 보면 그의 정치적 역량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인데, 고려 중기의 판원사 송대원을 시조로 삼고 있다.
대원의 3대손인 집서공 송명의가 충청도 회덕에 이주한 이후 이 곳에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송명의가 은진을 떠나 회덕에 이주한 이유는 그의 부인이 회덕 황씨였기 때문이다.
회덕 황씨의 시조 황윤보가 이 지역인 회천군에 봉해진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송명의의 처가는
이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다. 남녀동등 상속제였던 고려와 조선에서는 장가 잘 간 덕에
부유하게 된 인물이 많은데 그의 조상이 회덕에 눌러앉게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인다.
송시열의 집안은 증조부인 송구수 때만 해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종증조 송인수가
대사헌을 역임하는 조선 인종 무렵에 들어서야 비로소 유력한 벼슬에 이름을 올렸다.
우암의 조부 송응기는 도사벼슬을 했으며 그의 아버지 송갑조는 음직으로 봉사까지 올랐으나,
송시열을 회덕이 아니라 처가인 옥천에서 낳은 것은 가세가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송갑조가 송시열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학문의 순서는
그가 단순한 의리에서 서궁에 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자가 있은 후에 공자가 있고, 율곡이 있은 후에 주자가 있으니
주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송갑조가 가르친 율곡으로부터 학문을 시작하는 성리학 체제는 바로 서인들의 정치 이념이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는 서인들이 종주로 여기는 인물이다. 송갑조는 인목대비에 대한 북인들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여긴 점도 있었겠지만 이때 이미 서인들의 정치 이념에 깊이 동조하던 서인 당인이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부친 못 지 않은 서인 당인이었으나 훗날에는 율곡을 통해 주자로 나아가는 학문 순서를
주자 위주로 바꾸었다. 송갑조는 율곡을 통해 주자로 나아갈 것을 가르쳤지만 송시열이 학문에서
스스로 자립하고 난 이후에는 거꾸로 주자를 통해 율곡을 바라보려 하였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말씀마다 모두 옳으며 일마다 모두 마땅한 분이 주자이다. 총명과 예지가 있어 모든 이를 밝힌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못할 것이다. 주자가 바로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주자가 이미 말하고
행한 것은 곧 따라서 행했지 일찌기 의심한 바가 없다."
그는 심지어 주자, 곧 주회가 모든 것을 밝혀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책을 저술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성현이 되는 것은 주자에게 벗어나지 않는다.
달리 책을 저술해서 세상에 남기려는 것은 망령이고 군더더기다."
그가 남긴 많은 저술이 대부분 주자의 저술에 대한 해설서인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 후기 누구 못 지 않은 서인, 노론 당인이었던 송시열이 율곡보다도
주자를 높인 것은 의외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송시열에게 물었다.
"퇴계의 학설과 율곡의 학설은 현저하게 달라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선생님은 누구를 추종하십니까?"
"나는 퇴계와 율곡을 따지지 않고 주자와 같으면 좇고 주자와 다르면 좇지 않는다."
율곡 이이가 서인의 종주라면 퇴계 이황은 조선 후기 내내 서인과 대립하는
동인과 남인의 종주라는 점에서 '퇴계와 율곡을 따지지 않는다'는
우암의 말은 서인 당인으로서는 이례적인 언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