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 속에서 태어난 송시열
우암 송시열이 태어나고 성장할 무렵, 조선 지배층인 사대부 계급은
개국 아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에 태어났다. 권좌에서 몰락한 남인 영수 유성룡이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 해였다. 그 15년 전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정확히 200년 후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사대부 중심의 조선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왜군이 조선을 침범한 것은 선조 25년(1592) 4월 14일이었다.
불과 보름 후인 4월 29일 조선 조정은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가기로 결정했고,
다음날 새벽 선조는 궁궐을 빠져나갔다. 국왕이 도성 수비에 전력을 다하기보다
왜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망가자 백성들뿐 아니라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횡행했다.
백성들은 평소에는 얼씬도 못했던 대궐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백성들이 불을 지른 관청이 장예원이었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예원은 바로 노비들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백성들은 형조의 노비문서도 불태웠는데
이는 봉건적 신분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항거였다.
평소에는 백성들은 엄격한 신분제로 옭아매던 국왕과 사대부들이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대응 한번 변변히 못하고 무너진 데 대한 민중들의 분노였다.
백성들의 분노는 급기야 임금 선조에게까지 미쳤다.
유성룡, 이항복, 이산혜 등 불과 100여명의 호종을 받던 선조의 어가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국왕의 일행을 환영하기는커녕 어가를 막고 큰소리로 비난하고
심지어 돌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당하고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날 때도 없던 행위였다.
이제 조선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사대부에 대한 복종도 없었다.
심지어 전주에서 함경도 회령으로 귀양간 국경인은 왜란 발발 다음해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근왕병을 일으키러 오자 체포해 왜군 장수 가등청정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조선왕조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도 잇달았다. 선조27년 충청도를 중심으로 발생한
송유진의 난과 이듬해 역시 충청도에서 거병한 이몽학의 난이 대표적이었다.
송유진은 한때 2,000여 명이 넘는 세력을 거느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전주에 보낸 밀서의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국왕의 악정이 고쳐지지 않고, 붕당이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부역은 번거롭고 과중해서 민생이 편지 못하여 목야에서 무용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임란 당신 조경남이 남긴 '남중집록'에 따르면 이몽학 세력은 더욱 거셌다.
며칠이 안 되어 1만여 명이 몰려들었고, 이들이 지나가면 농민들은 김을 매다가도
호미를 들고 환호성을 올렸으며, 행상들은 몽둥이를 들고
즐겨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조경남의 목격담은 당시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경남이 성중에 들어갔을 때 마침 명나라 구인이 술을 잔뜩 먹고 가다가 길 가운데
구토하는 것을 보았는데, 천 백의 굶주린 백성들이 한꺼번에 달려와서 머리를 땅에 박고
핥아먹었는데, 약해서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밀려나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이보다 심한 상황이 '선조실록'신조 27년 정월조에 기록되어 있다.
"기근이 극심하여 사람고기를 먹기에 이르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괴이함을
알지 못한다. ... 길바닥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베어먹어 완전히 살이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혹은 산사람을 도살하여 장과 위, 뇌의 골도 함께 씹어 먹는다."
같은 기록 3월 조에는 "부자, 형제간에도 서로 잡아먹는 일이 있다"고 했으니
그 참상을 알 만하다. 당시의 학자였던 지봉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서울 수구문 밖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성보다 높았다."
임진왜란은 이처럼 백성들에게는 추상같더니 정작 추상같아야 할 외적에게는 허수아비
같았던 사대부 지배체제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대부들은 수탈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관리들은 수탈을 재개헸다.
'선조실록' 30년 12월조의 기록을 보자
"난리가 일어난 이래 관호가 너무 많다. 멸 명의 관원이 호칭은 다르지만
관장하는 일은 하나여서 백성 한 사람이 열 관원에게 피해를 받는다."
이런 상황이니 백성들이 더 이상 국왕이나 양반 사대부를 자신들의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왜란 전 170만 결에 달하던 조선의 농지 면적은
왜란 후 불과 3분의 1수준인 54만 결로 줄어들었으며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경상도의 농지 면적은 왜란 전에 비해 6분의 1로 줄어들었다.
조선사회는 비단 왜적의 침입 때문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후기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송시열의 인생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다는 점에 있다. 사대부 송시열은 바로 사대부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과 도전이 본격화된 선조 40년(1607) 11월 12일에
충청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구룡촌은 그의 외가였다.
조선에서 남녀차별이 심화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었고
당시만 해도 외가에서 해산하는 것이 그린 드문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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