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국한 세자의 급서
인조 23년 2월 소현세자는 장장 9년 간의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그리운 고국길에 올랐다.
이전의 두 번에 걸친 귀국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 귀국길이었다.
인조 23년(1645) 2월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심양에 잡혀갔던 세자는 삼십대 중반의
연부역강한 나이로 귀국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타국의 볼모로 보낸 34세의 비운의 왕세자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비운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귀국은 비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비운은 9년 간의 볼모 생활을 지혜롭게 보낸 데서 온 것이었다. 그는 치욕의
볼모 기간을 세상에 대한 저주의 나날로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간을
새로운 국제정세와 사상, 그리고 새로운 문물울 받아들여 체화시키는 기간으로 삼았다.
명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행위인지를 깨달았고,
성리학 이념 체계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사상인지도 깨달았다.
세상에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성리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던 것이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휴대한 채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뇌리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이상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상을 펼치기 위한
공간으로의 조선이 아니라 상상못할 비극의 현장으로서의 조선이었다.
비극의 조짐은 인조가 귀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를 막은 것이었다.
의심 많고 용렬한 부왕 인조에게는 세자의 귀국자체가 의혹의 대상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했기에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사고는 멀리했다.
소현세자가 휴대한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 몸짓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인조는 시종 세자에게 냉담했고, 부왕의 이러한 냉대에 상심했다.
이런 상심 때문인지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병에 걸려 누웠다.
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한 해 4월 23일로 어의 박군은 세자의 증세를
학질이라고 진단했다.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세자의 학질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의관 이형익이었다.
약방은 다음날 새벽에 인조에게 이형익을 시켜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주청했고 인조는 여기 따랐다.
그날 '인조실록'은 '화성이 적시성을 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세자의 발병 다음날인 24일부터 침을 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도 세자는 침을 맞았는데 그 다음날인 26일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한 나라의 세자가 그야말로 약 한 첩 못 써보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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