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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가서(山家序) / 길재(吉再)
    옛 이야기/고전 隨筆 2019. 3. 10. 03:50

    산가서(山家序) / 길재(吉再)

     

     

    대저 어려서 배우고 장년이 되어 행하는 것은 옛 사람의 도이다. 이런 까닭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배우지 않는 이가 없다. 저 속세에 초연하며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몸을 깨끗이 하고 인륜을 저버림 같은 것이야 어찌 군자의 하고자 하는 일일 것이랴?

     

    그러나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이미 있었은즉 안자(顔子)1)와 같은 이는 누추한 거리에서 스스로 즐기기도 하였고, 혹시 때가 맞지 않으면 태공(太公)2)과 같이 바닷가에서 숨어 살기도 하였으니 그러므로 고기를 낚건 밭을 갈건 어찌 그것을 나무랄 수야 있을 것이랴?

     

    내가 지정 연간(至正年間)3)에 여기다 집을 지었더니 이제 십여 년이 지났는데, 속세의 손님은 오지 아니하고 세속의 소식도 들리지 않으니 나와 벗하는 이는 산승(山僧)뿐이요, 나를 알아주는 것은 물새뿐이로다.

     

    명예에서 오는 영화로움과 이익을 위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고을의 태수(太守)조차 있건 없건 알 필요도 없이 피곤해지면 낮잠 자고 즐거우면 시를 읊고, 다만 해와 달이 오고 가고 시냇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만 볼 따름이다.

     

    벗이 있어 찾아오면 평상(平床) 위의 먼지를 쓸고 맞아들이고 용인(庸人)4)이 문을 두드리면 곧 침상에서 내려가 맞이하니 가히 군자의 화평(和平)하면서도 속류(俗流)에 물들지 않은 기상을 볼 수 있으리라.

     

    많은 암혈(巖穴)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고 뭇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으며,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유조(幽鳥)5)와 이상하게 생긴 짐승들, 솔바람이며 나월(蘿月)6)을 바라보면서, 학이며 잔나비가 울음 울고, 산일(山日)이 차가워지면서 가을이 다가오고, 달빛조차 맑은 저녁이 되려 할 제, 그럴 때면 냉철한 마음과 맑은 뜻7)으로, 저 거룩한 우왕(禹王)이 높은 산에 제사지내던 공력(功力)을 그려본다.

     

    강바람은 불지 않고 파도조차 일지 않아 아득하고 멀고 넓고 넓은데, 흰 갈매기와 싱싱한 물고기들이 유유히 지나가고 장삿배들 서로 바라보며 어부 노래 화답할 제, 그럴 때면 머리를 끄덕이며 멋대로 시 읊으며, 저 거룩한 우왕(禹王)의 홍수 다스린 공로8)를 그려 본다.

     

    샘물은 출렁출렁 갈증을 달래고 강물은 넘실넘실 갓 끈을 씻을 만한데, 술 있으면 거르고 술 없으면 사 와서, 혼자서 따라서 혼자서 마시고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을 추니, 산새들은 내 노래의 벗이요, 처마 밑 제비들은 내 춤의 짝이 되었도다.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에 올랐을 적 기상9)을 그려보고, 물가에 이르러 시를 지으며 공자가 강가에서 탄식한 것을 배운다.

     

    회오리바람 일지 않으니 단칸방도 편안한데, 밝은 달이 뜰에 내리면 천천히 혼자 거닐고 주룩주룩 비라도 내리면 이따금 목침(木枕)을 높이 베고 시름 잊는 꿈을 꾸고10), 산골짜기에 펄펄 눈이라도 날리면 가끔 가다 차라도 끓여 혼자 마신다.

     

    봄날이 따사하고 고우면 뭇 새들 서로 화답하여 지저귀며, 풀숲은 우거져 흰 산쑥 나물 천천히 캐며, 버들개지 날리고 복숭아꽃 살구꽃 피어나면 친구 한 두엇 데리고서 물 찾아 목욕하고 언덕에 올라 바람 쐬며11), 이따금 푸른 매며 사나운 개를 데리고 흰말 타고 금빛 화살 쏘며 사냥하고, 또 때로는 술개미12)에 좋은 안주 있거드면 청려장(靑藜杖)13)을 짚고 막대를 끌면서 꽃밭과 대나무 숲을 찾아들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여름날의 찌는 듯한 더위가 사람들을 괴롭힐 때면 높은 돛을 단 배를 타고 강호(江湖)로 찾아들어 땅거미지고 서늘해짐을 즐기고, 성긴 빗발이 실오리처럼 흩뿌리면 쟁기 끌고 호미 메고 전원으로 돌아간다.

     

    건들장마 갓 개게 되면 혹서(酷暑)도 풀리면서 온갖 곡식 다 익어가고, 농어들이 살 오르면 고깃배에 비스듬히 앉아 낚싯줄 드리운 채 물결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오기도 한다. 갈꽃14)은 버석버석, 줄풀15)에 부는 바람은 살랑살랑, 안개비는 오락가락, 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은 늠실늠실 호탕하게 만리를 달리니 그 누가 능히 막을 수 있으랴.

     

    또다시 눈보라가 창을 때리고 겨울 기운 매워지면 혹은 화로를 끌어안고 앉아 술독을 열어젖히고, 또는 책을 펴고서는 천군(天君)16)을 다독이며, 우뚝하여 끝없는 천지에 스스로 조용히 즐기는 것이 어찌 은자(隱者)의 즐기는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즐거움이 어찌 이런 데 있는 것뿐이랴. 그러한 즐거움이란, 어허! 보잘것없는 것이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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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자(顔子): ‘안회(顔回)’를 높여 이르는 말. 중국 춘추 시대의 유학자(B.C.521-B.C.490). ()는 자연(子淵)이다. 자를 따서 안연(顔淵)이라고도 부른다. 공자의 수제자로 학덕이 뛰어났다. 그러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논어?「옹야(雍也)편에는 공자가 안회를 두고 한 말이 나온다.

    子曰 賢哉回也一簞食一瓢飮으로 在陋巷人不堪其憂어늘 回也不改其樂하니 賢哉回也.”(“어질구나, 안회는. 한 도시락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리에서 사는 일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구나, 안회여.”)

    2) 태공(太公): 태공망(太公望)을 가리킨다. 본명은 강상(姜尙)이다. 중국 은()나라 말 주()나라 초의 군인·정치가. 백이(伯夷)의 후손이며 산둥성[山東省] 출신으로, 그의 선조가 여()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속칭 강태공(姜太公)이라고 한다. 태공망(太公望)이라는 명칭은 주나라 문왕(文王)이 웨이수이 강[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선군(先君)인 태공(太公)이 오랫동안 바라던() 어진 인물이라고 여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3) 지정 연간(至正年間): ‘지정(至正)’은 원() 순제(順帝)의 연호로 1341-1367 년에 해당한다.

    4) 용인(庸人)=범인(凡人): 대수롭지 않은 사람. 평범한 일반 사람.

    5) 유조(幽鳥): 소리만 들리고 보이지 않는 새.

    6) 나월(蘿月): 덩굴 사이로 바라보이는 달.

    7) 냉철한 마음과 맑은 뜻: 원문은한심상지(寒心爽志)’.

    8) 우왕(禹王)의 홍수 다스린 공로: 우왕(禹王) 때에는 홍수가 잦았다. 그래서 우왕은 13년 동안 치수(治水)를 위해서 노력하면서 자기 집 앞을 세 번 지나갔는데도 한 번도 집에 들른 적이 없다[三過其門而不入]. 여기에서 과문불입(過門不入)’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맹자?「등문공 상(滕文公 上))

    9)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에 올랐을 적 기상: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서는 노나라가 작다고 하셨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孔子 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맹자? 「진심장구 상(盡心章句 上))

    10) 이따금~꿈을 꾸고: ‘子曰 飯疏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樂亦在其中矣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이니라.(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베고 누워 있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으니, 의롭지 않은 부()와 귀()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도다.")라는 대목을 생각나게 해 주는 표현이다.(?논어? 「술이(述而)

    11) 물 찾아~바람 쐬며: 공자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제자 중 한 사람인 증점(曾點)이 답한다. “늦은 봄철에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과 더불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舞雩: 기우제 터)에 올라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春服旣成이어든 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으로 浴乎沂하여 風乎舞雩하며 詠而歸하리이다.) 이에 공자는 나도 증점과 뜻이 같다고 했다.(?논어?「선진(先進))

    12) 술개미: 술이 익어가면서 위로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기운. 술구더기라고도 하는데, 술이 거의 익을 무렵 녹색 기포가 쌀알만큼하게 생기는데, 마치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여 술개미라고 한다.

    13) 청려장(靑藜杖): 명아줏대로 만든 지팡이. 가볍고 단단하다.

    14) 갈꽃: 갈대꽃. 노화(蘆花).

    15) 줄풀=: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열매와 어린 싹은 식용하고 잎은 도롱이, 차양, 자리를 만드는 데에 쓴다. 못이나 물가에서 자라는데 한국, 일본, 중국, 시베리아 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16) 천군(天君): 마음.

     

     

     

     

    해설

     

    지은이 길재(吉再: 1353-1419)는 여말 선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여말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에게서 배웠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창왕 때 문하주서(門下注書)1)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한다는 구실로 사직하고 귀향(歸鄕)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李芳遠)이 그에게 태상박사(太常博士)2)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쓰며 일생을 마쳤다.

     

    산가서(山家序)?야은집(冶隱集)? 야은선생언행습유 권상(冶隱先生言行拾遺卷上)의 선생유문(先生遺文)에 실려 있다. 벼슬길에 나가기 전인 30세 전후에 쓴 글로서 그 분위기가 밝다. 특히 눈발이 날릴 때 차()를 끓여 혼자 마신다는 대목이 있어 다도(茶道)를 즐기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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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하주서(門下注書): 고려 시대에, 문하부(나라의 정사를 총괄하던 중앙 최고의 통치 기관)에 속하여 문서 또는 기록을 맡아보던 종7품 벼슬.

    2) 태상박사(太常博士): 고려 시대에, 태상시太常寺/大常寺]에 속하여 제사 및 시호(諡號)의 일을 맡아보던 정6품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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