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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시습전(金時習傳) / 이이(李珥)
    옛 이야기/고전 隨筆 2019. 3. 15. 15:14

    김시습전(金時習傳) / 이이(李珥)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으로 강릉인(江陵人)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예(後裔)에 왕자 주원(周元)1)이란 이가 있었는데, 강릉에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인하여 본적(本籍)으로 삼았다. 그 뒤 (중략)일성(日省)2)이 음사(陰仕)로 충순위(忠順衛)3)가 되어 선사 장씨(仙槎張氏)에게 장가들어 한성에서 시습을 낳았다.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리 뛰어나서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최치운(崔致雲)4)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시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시습은 말은 더디었지만 정신은 놀랄 만하여 글을 보면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세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섯 살에 ?중용??대학?에 통달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5)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았다.

     

    장헌대왕(莊憲大王)6)이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시()로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할 듯하니, 그 가정에 권면하여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하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고,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그의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쳐 이름을 부르지 않고 5(五歲)라고만 불렀다. (중략)

     

    노산(魯山)7)3년 만에 왕위를 손위(遜位)8)하게 되었는데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대곡(放聲大哭)을 하고는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발광(發狂)을 하여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佛門)에 의탁(依託)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여러 번 바뀌어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사람됨이 생김새는 못생기고 키는 작았으나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영특하였으며 단순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으며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속(時俗)에 마음을 상하고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고, 세속을 좇아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드디어 육신에 구애받지 않고 세속 밖을 방랑하며 노닐어 나라 안의 산천치고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名勝)을 만나면 곧 거기에서 머물러 살았고, 고도(故都)를 찾아가면 반드시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여러 날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총명하고 뛰어남이 남달라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은 어렸을 때에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제자(諸子)와 백가서(百家書)는 배우지 않고서도 섭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고금(古今)의 문적(文籍)을 꿰뚫지 않은 것이 없어 남의 질문을 받으면 응대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중략)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것과도 같고,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것과도 같으며, 신이 선창하고 귀신이 답하는 것과도 같아 얼핏 보아서는 여러 단계의 의미가 드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실마리를 잡아내지 못하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는 애써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그 뛰어남은 생각이 고상하고 원대함에 이르고 통상적인 정()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므로 문장이나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갈 바가 되지 못하였다. (중략)

     

    스스로도 명성(名聲)이 너무 일찍부터 높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은 유교에 두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시속(時俗)에서 해괴하게 여김을 취하여, 일부러 광태(狂態)를 지으며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학자로서 학문을 배우겠다고 하는 이가 있으면, 나무토막이나 돌멩이로 때려 보기도 하고, 또는 활을 당겨 쏘아 보려고도 하여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하에 머물러 있는 이가 적었고, 또 산전(山田) 개간하기를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의 자식일지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수고를 거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드물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한참 읊조리다가 문득 곡하고는 깎아 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종이에 쓴 후 남에게는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리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나무를 조각(彫刻)하여 농부가 밭갈이하는 모습을 만들어 책상 옆에다 두고 종일토록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또한 울면서 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가 이삭이 패어 나와 탐스럽게 되었을 때에 술에 취한 채 낫을 휘둘러 모조리 쓸어 눕히고는 목 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속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산에 있을 때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중략)서울의 소식을 물어보고 (중략)인망 없는 인물이 고위 고관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통곡하되,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사람이 이 직책을 맡게 되었나?” 하였다. 당시의 이름난 공경(公卿)인 김수온(金守溫)9)과 서거정(徐居正)10)은 국사(國士)로서 칭찬하였다.

     

    거정(居正)이 막 조정에 들어가느라고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마침 시습이 남루한 옷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11)를 쓴 채로 그 길을 지나다가 그 행차의 앞길을 범하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강중(剛中)12)은 편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수레를 멈추어 이야기하니,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벼슬아치 가운데 어떤 이가 시습(時習)에게 모욕을 당하고 참을 수가 없어, 거정(居正)에게 알리고 그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자 거정은 머리를 저으며, “그만두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지려 하는가? 지금 이 사람을 벌하면 백대(百代)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에 누()가 되리라.”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13)로서, ‘맹자가 양()나라 혜왕(惠王)을 뵙다.[孟子見梁惠王]’라는 논제로 태학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상사생(上舍生)14) 한 사람이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시습을 찾아가서, “괴애(乖崖)15)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뵙다.’란 것이 어찌 논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며, “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더니, 주필(走筆)16)로서 글을 지어서 주며, “자네가 지은 것이라 하고, 이 늙은이를 속여 보라.” 하여, 상사생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온이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문득, “열경(悅卿)17)이 지금 서울 어느 산사(山寺)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이 숨길 수가 없어 알리게 되었다. 그 논지(論旨)의 대략은, “양나라 혜왕은 왕을 참칭하였으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 수집하지 못하였다. (중략)

     

    성화(成化)18) 17(1481, 성종12)에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그 글의 대략은, “()이 오교(五敎)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으뜸이요, 죄가 3,000가지나 되더라도 불효(不孝)가 가장 큽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어찌 양육(養育)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중략)

     

    드디어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었다. 벼슬을 하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시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의연하게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기를 예전대로 하였다.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19)을 외우고, 외우고 나서는 반드시 통곡하였다. 어떤 때에는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서 잘못된 것을 바르다고 궤변(詭辯)을 늘어놓아 승소(勝訴)하게 하고는 판결문이 나오면 크게 웃고는 찢어 버렸다.

     

    시전(市廛)의 아이들과 어울려 멋대로 노닐다가 술에 취하여 거리에 드러눕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20)이 저자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놈아, 그만두어라.” 하고 소리쳤다. 창손은 못들은 체하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위태롭게 여겨 친구들이 절교(絶交)를 하였는데 오직 종실(宗室) 수천부정(秀泉副正) 이정은(李貞恩)21)과 남효온(南孝溫22)안응세(安應世)23)·홍유손(洪裕孫)24) 등 몇 사람들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중략)

     

    얼마 안 되어 그의 처가 죽으니,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두타(頭陀)25)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襄陽) 등지로 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고, 설악(雪嶽한계(寒溪청평(淸平) 등의 산에 많이 머물렀다. (중략)

     

    홍치(弘治)26) 6(1493, 성종 24)에 병이 들어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27)에서 생을 마쳤으니 나이 59세였다. 화장을 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절 곁에 임시로 빈소를 차려 두었다가 3년 후에 안장하기 위하여 그 빈실(殯室)28)을 열어보니 안색(顔色)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승도(僧徒)들이 성불(成佛)하였다고 놀라 감탄하고, 마침내 다비(茶毘)29)를 하여 그의 유골(遺骨)을 취하여 부도(浮圖)30)를 만들었다.

     

    생시에 손수 자신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려 놓고 스스로 그 찬()을 절에 남겨 두었는데, 그 찬에 마구잡이로 써놓기를, “너의 얼굴은 지극히 못생겼고 너의 말버릇은 너무 당돌하니 너를 구렁텅에 처넣어 둠이 마땅하도다.” 하였다. 그의 시문(詩文)은 거의 흩어져 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그것을 이자(李耔)31)·박상(朴祥)32)윤춘년(尹春年)33) 등이 앞다투어 수집해서 세상에 간행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고르지 않아 날 때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로써 하는 말이다.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장에 있어서는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문장에도 날 때부터 아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으니, 그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제멋대로 행동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록 빛과 그림자를 감추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던 줄 모르게 한들 무엇이 연민스러울 것인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재주가 타고난 기량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가볍고 맑은 기운은 넘쳐나게 받고 투텁고 무거운 기는 모자라게 받았던 것이 아니었는가 한다. 그러나 그는 절의를 내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 뜻을 다하여 일월(日月)과 더불어 그 빛을 다투게 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이는 나약한 사람도 또한 바르게 서게 하니, 비록 백세의 스승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애석하구나. 시습의 영특하고 날카로운 자질로써 학문을 연마하고 실천의 공업을 쌓았더라면, 그 이룬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아, 그의 기품이 있는 말과 준엄한 논의는 기피해야 할 것도 범하여 저촉하였고, 공경(公卿)마저 꾸짖고 매도(罵倒)하여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우리 선왕(先王)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으로 말하면 말세에 이르러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에, 그 득실이 어떠하겠는가? , 거룩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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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원(周元): 김주원(金周元)을 말한다. 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작고하자 뭇 신하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홍수로 알천(閼川)이 범람하여 건너올 수 없게 되자,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상대등 김경신(金敬信)을 원성왕으로 추대하므로 그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도피하여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설에는 그가 도피 중 잠시 은거하여 지내던 곳이 지금의 국립공원 주왕산(周王山)이라 한다.

    2) 일성(日省): 김일성(金日省). 김시습(金時習)의 아버지로 자는 척연(惕然),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벼슬은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3) 충순위(忠順衛) :왕족이나 관리 또는 관리들의 자손이나 친족들로 조직한 군대.

    4) 최치운(崔致雲: 1390-144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鏡湖조은(釣隱). 집현전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구하였고, 공조참의와 이조참의를 거쳐 좌승지를 지냈다. 여러 차례 사신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서 외교적인 공을 세웠다. 한편, 왕명으로 ?무원록(無寃錄: 중국 원나라의 왕여(王與]1308년에 엮은 법의학서. 송나라의 ?세원록(洗冤錄)??평원록(平冤錄)? 따위를 참고하였다.)?을 주석(註釋)하고 율문(律文)을 강해(講解)하는 등 학문정비에 기여하였고, 형옥(刑獄)에 관하여 여러 번 왕에게 자문을 하였으며, 뒤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술을 지나치게 즐겼으므로 왕이 친서를 내려 절제할 것을 명하자, 그 글을 벽에 걸어두고 출입할 때에는 꼭 이것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5) 허조 (許稠: 1369-1439):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조선 초 예제(禮制) 등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을 때, 허조가 이를 정비하였다. 잇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당시까지 유행하던 불교식의 부도법(浮屠法)을 쓰지 않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상례를 치렀다. 태종은 일찍이 세종에게 그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야말로 참 재상이며 나의 주석(柱石) 같은 신하이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검소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조선 전기의 어진 정승(政丞)으로서 황희(黃喜)와 함께 첫손에 꼽힌다.

    6) 장헌대왕(莊憲大王): 성은 이(), 휘는 도(), 자는 원정(元正)이다. 장헌대왕(莊憲大王)은 시호(諡號)인데, 정식으로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7) 노산(魯山):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그 신분이 격하되었을 때에 붙여진 칭호.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 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겨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죽은 지 241년 뒤인 숙종 24(1698)에 왕위를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이라고 하였다.

    8) 손위(遜位): 임금의 자리를 내어놓음.

    9) 김수온(金守溫): ‘압구정기(狎鷗亭記)’의 해설을 참고할 것.

    10) 서거정(徐居正): 조선 전기의 학자(1420-1488).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 따위에 정통하였고,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함)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하기도 했다. 저서에 ?사가집(四佳集)?,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등이 있다.

    11)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로 엮은 삿갓.

    12)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

    13)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 둔 으뜸 벼슬로 정2(正二品)이며 정원은 1인이다. 통상 대제학(大提學)이 겸임하였다.

    14) 상사생(上舍生):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초에는 150인이었으나, 1429년에는 200인으로 증원되었다. 이 중 반은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이라 하여 생원·진사로서 입학한 정규생(正規生)이었으며, 나머지 반은 기재생(寄齋生: 別科生) 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여 유학(幼學) 중에서 선발된 자들이었다.

    15)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호.

    16)주필(走筆): ‘특별한 구상이나 퇴고할 시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달리듯이[] 곧바로 써내려가는 글 []. 일종의 즉흥시라 하겠는데 작가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이라 하겠다.

    17)열경(悅卿): 김시습(金時習)의 자().

    18)성화(成化): 명나라 제8대 성화제(成化帝: 1447-1487)의 연호(年號). 성화제의 이름은 주견심(朱見深), 초명(初名)은 견준(見濬).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방술(方術)을 지나치게 믿었고, 환관 왕직(汪直)을 기용해 무고한 충신들을 마구 죽였다. 왕직이 축출된 뒤에도 또 환관 상명(尙銘)을 불러 들여 매관매직을 거침없이 자행했다.

    19) 이소경(離騷經): 이소를 하나의 경전으로 일컬어 부르는 명칭이다.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 이름은 굴평[屈平]이고, []은 자이다.)이 지은 부()로서, ‘이소(離騷)’의 뜻은 근심을 만났다.’는 것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후의 시름을 노래한 글이며, ?초사(楚辭)? 가운데에서 최고 걸작으로 치는 글이다. 중국 문학은 북쪽의 시경체(詩經體), 남쪽의 초사체(楚辭體)가 중심이 되어 발달하였는데, 남쪽의 초사체의 원조가 바로 굴원의 이소경이다.

    20) 정창손(鄭昌孫): 조선 초기의 문신(1402-1487). 자는 효중(孝中),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한글 창제와 왕실의 불교 숭상을 반대하여 투옥되었으나, 후에 사육신의 단종 복위 음모를 고발하여 그 공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21) 수천부정(秀泉副正) 이정은(李貞恩: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중(正中), 호는 월호(月湖설창(雪窓남곡(嵐谷) 등이다.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아들로 수천군(秀泉君)에 봉해졌다. 일찍이 수천부정(秀泉副正: 從三品)에 봉해졌다가 도정(都正: 正三品 堂上)에 올랐다. 인품이 독실, 돈후하여 스스로 겸손하며, 식견과 도량이 있고, 학문의 이치를 터득하여, 일찍부터 김굉필(金宏弼남효온(南孝溫) 등의 사림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성종대에 사림파가 정치적 역량을 높여가자 이들과 교유를 끊어 사화 때에 화를 면하고, 이후 음률(音律)에 심취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22) 남효온(南孝溫): 조선 시대의 생육신(1454-1492). 자는 백공(伯恭). 호는 최락당(最樂堂)추강(秋江)행우(杏雨)벽사(碧沙).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세조에 의하여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각지를 유랑하다 병사하였다. 저서에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록(師友錄)? 등이 있다.

    23) 안응세(安應世: 1455-1480): 조선 성종(成宗) 때의 유학(幼學).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안중담(安仲聃)의 아들. 남효온(南孝溫김시습(金時習) 등과 교유하고 악부(樂府)에 뛰어났으나, 26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24) 홍유손(洪裕孫: 1431-1529): 조선 초기의 시인.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광진자(狂眞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속의 영화를 끊고, 남효온(南孝溫이정은(李貞恩) 등과 어울리며 시주(詩酒)로 생애를 보냈다. 김수온(金守溫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 등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죽림7현을 자처하였다. 무오사화 때 제주도에 유배되고 노예가 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76세에 처음으로 처를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얻어 지성(志誠)이라 이름하였다. 저서로는 ?소총유고?가 있다.

    25) 두타(頭陀): 중 모양으로 머리를 깎고 눈썹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

    26) 홍치(弘治): 중국 명나라 효종 때의 연호(1488-1505).

    27)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 충청도에 있음.

    28) 빈실(殯室),빈소(殯所): 상중에 죽은 사람의 혼백이나 신주를 모셔두는 곳. 상청(喪廳궤연(凡筵)이라고도 하며, ()을 마친 뒤에 설치하여 탈상 때 철거한다.

    29) 다비(茶毘): 산스크리트어 '자피타(Jhapita)'의 음역(音譯). 죽은 시체를 불에 태우는 장례법인 화장(火葬)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은 윤회한다고 보기 때문에 혼이 빠져 나간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보고 집착하지 않고 태워서 없애 버리는 것이다.

    30) 부도(浮圖): 고승(高僧)의 사리를 안치한 탑.

    31) 이자(李耔:1480-1533): 조선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사림파(士林派)의 한 사람으로 도학정치의 이상을 추구했으며, 온건하고 원만한 성품이었다. 1518년 북경에 파견되었을 때, 정사(正使)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회복시켰던 덕으로, 기묘사화 때 큰 화를 면하였으나 파직, 숙청되었다. 파직된 후 음성(陰城)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32) 박상(朴祥:1474-1530): 조선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를 주장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33) 윤춘년(尹春年:1514-156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창주(滄洲)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小尹)의 영수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대윤일파의 제거에 앞장섰고, 이를 계기로 윤원형의 총애를 받게 되어 이후 급속히 출세하였다. 대사간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조판서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윤원형이 실각하자 파직당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성격이 경박하고 자부심이 강하였으나, 주색을 즐기지 않고 비교적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해설

     

    지은이 이이(李珥: 1536-1584)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등이고, 아명은 현룡(見龍)이며,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진다.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으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45세 때 대사간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48세 때 다시 관직을 버리고 율곡리로 돌아가서 다음해에 죽었다.

     

    저서에?성학집요(聖學輯要)?,?경연일기(經筵日記)?,?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이 있다

    이 글은 ?율곡선생전서? 14권 잡저(雜著) 중의 김시습전에 나온다. 그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의 전기를 쓴 것을 보면, ‘십만양병설등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에 대하여 상당히 실망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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