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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소현세자 - <3>
    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019. 2. 15. 19:38


    
    ■ 소현세자
    
    ■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인조의 이런 소견 좁은 처사는 많은 사대부들의 불만을 낳았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반정 명분으로 삼은 인조가, 며느리  강씨의 왕곡을 막은 것은 
    심각한 자기 부정 이었다. 며느리 강빈의 왕곡을 끝내 허락하지 않은 인조의 처사로 인해 급기야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주모자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청원부원군 심기원이란 데서 인조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감정을 알 수 있다. 
    끝내 세자빈의 왕곡을 허락하지 않은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의 심양으로 되돌아갈 때 환관 김언겸을 
    딸려 보냈다. 김언겸은 인조가 세자부루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간자, 측  첩보원이었다. 친아버지 
    인조는 이처럼 세자 부부를 의심해 간자까지 딸려 보냈으나, 세자는 배웅 나온 심기원과 김류, 홍서봉, 
    조창원 등 여러 부원군들에게 인조의 병을 옆에서 보살피지 못하는 심정과 이역에서 나그네로 머물러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여 듣는 이의 눈물을 훔치게 하였다. 
    바로 그 이틀 후인 인조22년  3월21일 부사직 황익과 오국별장  이원로 등이, 청원부원군 심기원, 
    전지사 이일원, 광주 부윤 권억 등이 모반하려  한단고 고변했다. 
    고변자 황익이 전하는 심기원의 말은 이렇다.
    "주상이 반정한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상황으로 추존하고 세자에게 전위하게 
    하고 싶어 내 집의 재산을 털어 온 수천냥을 마련하고 역사를 모집하여 지성으로 대접했는데, 
    내 소원은 오로지 강상을 부식하는데  있는 것이다. 지난번 세자가 심양에서 나왔을  때 
    전위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아무리 세자를 받들어 세운더라도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지 않고 회은군을 추대하려 한다."
    또 심기원과 함께 정형당한 초판 정형은 심기원과 종질 권두형 형제의 말을 전했다.
    "숙주께서 명선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그들과  합세해 심양과 끊으려고 하지만, 세자는 
    본디 원대한 계획이 없고 주상도  원수를 갚을 길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22일 거사한 후에 
    상에게 왕자 중에 합당한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높인 다음 정예포수 5만명을 
    거느리고 심양을 쓸어버린다면 어찌 남자의 사업이 아니겠는가."
    즉 이들은 세자가 귀국했을 때 거사를 일으켜 인조를 상왕으로 내쫓은 후 북벌을 단행하려 
    했으나, 소현세자를 추대하는 것이 여의치 앉자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인조의 처사는 의외이다. 인조는 여러 신사들이 다 심기원을 정형하라고 
    청하는데도 사사를 고집하다가 허락하였으며, 그 시신은 팔도에 돌리지 말고 가족에게 내주어 
    장사 지내게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덕인은 정형하지 않고 사사하고 재산도 적몰하지 않았다. 
    역모 사건의 주범에  대한 처사치고는 매우 온건했다.  또한 심기원과 권억, 정형, 이일원, 이지룡, 
    이권, 김즙, 권두창등 관련다들을 정형한 후, 그해 4월 1일 명정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대적인  사면 조치를 내린다. 이 또한  이례적인 거조가 아닐 수 없다.
    인조로서는 반정 일등공신인 자신을 폐하고 세자나 회은군을 옹립하려 한 사건을  확대해 좋을 것이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렇지  않아도 인심을 잃은 인조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자신을 추대하려는 사건으로 옥사가 벌어지는  동안 조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이런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청의 구왕을 따라 북경에 
    가야했다. 그해 4월 이자성 군대를 산해관에거 격파함으로서 중원 정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청은, 
    중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데려간 것이다. 
    세자는 이렇듯 동아시아 정세를 놓고 자웅이 일철을 겨루는 역사적현자의 한가운데  있었으므로, 
    국내의 추대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추대니 모반이니  하는 소모적 정쟁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세자는 북경에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 아담 샬과의 만남
      
    그 해 5월, 하루 평균120-30리 길을 달리는 청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한 세자는 구왕이 이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청이 북경을 차지한 것은 대세가 이미 
    청에게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북경에 도착한 세자는  문연각이라 불리던 명 목종의 부마 후씨 집에 
    가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 일 만에 심양으로 되돌아왔다가, 
    그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셀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다.1628년 32번째 예수회 신부로서 북경  옹안문 내에 거주한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아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청 세조는 북경 점령후 그의 과학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으로 삼고 
    대청시헌력을 짓게 하였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무문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아담샬의 거주지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 숙소인 문연각은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와의  만남은 조선에 천주교를 전교
    할 수 있는 호기였고,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서양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머나먼 이국 땅으로 자청해서  온 푸른 눈의 선교사와, 불모로 잡혀  온 불행한 세자의 
    남다른 처지가 이색적인 감화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 만남을 지켜봤던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순치 원년에 조선 국왕 인조의 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와서 아담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에  대해서 살펴 물었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깊이 사귀었다.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임을 말하였는데 제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며  자세히 물었다. 세자가 귀국하자 샬 신부는 자신이 지은 천문, 산학, 성교정도서적 
    여러 가지와 여지구, 천주상을 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곧 아담 샬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국하기 232년 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섰다. 소현세자의 이  개방적인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9년간 볼모 생활을 소현세자의 사고를 이처럼 
    개방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세자는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tif은 신부 대신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송, 장삼외, 유중림, 곡풍 등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진왜란때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최초로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1644년 11월 1일 청 세조는 북경의 첫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선포했다.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 달 11일  구왕은 용골대를 시켜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을 전했다. 
    "북경을 얻어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왕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 비운의 귀국길
    
    드디어 길고 긴 볼모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는 이유는 구왕의 말대로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세자를 붙잡아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기쁨에  앞서 다음과 같이 우려하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청이 세자를 돌려보내는 이 조치가 참으로 좋은 뜻에서 나왔고 딴마음은 없는 것인가?"
    대신들은 모두 다른 염려는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에게  세자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귀국하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조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채 장장 9년 간 품어왔던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 귀국은 이전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돌아오는 것이었다. 
    인조 23년2월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심양에 잡혀 갔던 세자는 삼십대 중반의 연부 연강한 나이로 
    귀국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타국에서 볼모로 보낸 34세의 비운의  왕세자였다. 세자는 이제 
    자신의 비운이 끝나는줄 알았으나, 귀국은 비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비운은 9년간의 볼모 생활을 지혜롭게 보낸 데서  시작되었다. 세자는 치욕의 볼모 기간을 
    새로운 국제 정세와 사상,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체화시키는 기간으로 삼았다. 명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달았고, 성리학 이념 체계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도 
    깨달았다. 세상에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리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가지고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머리 속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이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조선은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 못할 비극의 현장이었다.
    비극의 조짐은 인조가, 귀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를 막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부왕 인조는 명나라가 멸망했기에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합리적 사고를 멀리한 채, 그저 세자의 귀국 자체를 의혹의 눈초리로만 바라보았다. 
    세자가 휴대한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새로룬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몸짓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소현세자가 귀국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운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의 냉담한 
    반응에  깊이 상심한 것이, 병으로 연결될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그 이외에 
    인조나 후궁 조씨의 외부적 작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국한 해 4월 23일 세자가 병석에 누윤 이유는  학질이었다. 
    이미 장성한 세자에게 학질을 그다지 큰 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세자의 학질을  치료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의 이형익이 바로 
    세자 독살설의 한가운데 위치한 인물이다. 
    이형익이  열을 내리게 한다며 발병 다음날부터 침을 놓았는데, 
    침을 맞은 세자가 3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한  나라의 세자가 학질에 걸렸는데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침만 맞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귀국한 해 4월 26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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