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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소현세자 <5>
    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019. 2. 18. 00:38


    
    ■ 소현세자
    
    ■ 세자 일가의 비극
    
    원손의 지위를 빼앗은 것으로도 세자 일가에 대한 인조의  분노는 끝나지 않았다. 인조의 화살은 
    이제 남편을 잃고 상심해 있는 며느리 강빈에게 향해졌다. 인조는 강빈이 처와 결탁해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즉위시킬 했다고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세자가 죽은 후에도 강빈이 청과 결탁해 
    자신을 내몰고 원손을 즉위시킬수 있다고 의심했다.
    인조는 저주 사건을 이용해 강빈을 제거하려 했다. 원손이 폐립된지  약 두 달 후인 인조 23년 8월말,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가되어 두  명의 궁녀가 하옥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원손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인형과 조수따위를 마당이나  베갯속 등에 묻어두고 상대방에게 화가 내릴 것을 비는 
    저주 사건은, 그 성격상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인정하는 관례를 이용해 
    강빈을 얽어넣으려고 두 궁녀를  심하게 고문했으나, 두 궁녀는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는 대신 
    죽음을  택함으로써 강빈을 보호했다. 그러자  이조는 강빈의 오라비를 귀양 보내는 등 강빈의 
    친정을 치죄하여 손발을 묶은후 다시 저주 사건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강비의 궁녀 두 명이 
    연루되었으나, 이들 역시 조작된 자백을 거부하고 죽어갔다.
    그러나 며느리에 대한 인조의 분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조 24년 정월에는 dls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오른 사건이 발생했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빈에게 혐의를 돌려 궁인들을 하옥해 
    국문하고 강빈은 후언 별당에 감금했다. 인조의 수하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강빈이 독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조가 이미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는 
    엄명을 내려 강빈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놓은 상태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도 인조의 자작극이 분명하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인 정렬과 유덕이 하옥되어 압슬과 낙형같은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들도 
    조작된 시나리오를 승인하지 않고 고문 속에 죽어갔다 이렇듯 연일 무고한 궁녀들이 죽어감에도 
    인조는 며느리의 목숨을 끊으려는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언복구이에 독을 넣은 사건도 
    오리무중에 빠진  후 인조는 비망기를 내린다. 그런데  그 비망기의 내용은 인조 자신이 소현세자를 
    죽인 범인이며 저주 사건과 독약 사건을 자작했음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 적의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 때문에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본다면 흉한  물건을 파놓아 저주하고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옛부터 난신 적자가 어느시대나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항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라."
    강빈이 역적이라는 이 비망기는 그러나 인조 자신이 모든 비극의 주범임을 실토하는 자백서나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자신의 죄가 비망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잊은 것이다. 
    신하들은 물론 강빈이 무죄라고 생각했으므로, 역적죄로 품의해 올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인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병조판서를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김자점을 호위청에 입직시켰으며  포도대장에게 궁궐을 엄중히 경비하라고  명했다. 
    인조는 이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대사헌 홍무적이 강경히 반대했다.
    "강빈을 폐위시킬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강빈을 죽이고자 하신다면 
    먼저 신을 죽인 다음에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강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구하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드디어 재위 24년 2월 인조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명을 거두어달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인조는 끝내 자신에 의해 과부가 된 며느리에 대한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강빈을 결국 사저로 쫓겨난 후 사약을 마셨고 교명, 죽책 등은 거두어  불태워졌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쯰어 장살시켰다.
    소현세자에 이어 강빈마저 세상을 떠났으나,  세자 일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빈을 죽인 후 인조는 이전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모진 고통속에서도 끝까지 강빈을 지키던 
    궁녀들은 이제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강빈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결국 고문자의 
    의도에 굴복하고 강빈의 이름을 댔다. 
    인조는 이를 명분으로 이 사건을 강빈의 친정어머나와 강빈의  세아들, 즉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손자이기도 한 어린 아이들에게  확대시켰다. 인조는 안사돈이었던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유배 보냈다.  이들의 유배지를 정하라는 인조의 명을 받은 의금부는 
    석출은 제주에, 둘째 석린은 정의에, 그리고 석견은 대정에 유배하자고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거부했다. 
    "한 곳에 정배하여 서로 의지해서 살도록 하되 내관과 별장 등을 교대로 지정해  보내 외부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세 고을에 정배된 사대부는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라."
    당시 제주에는 "강빈을 죽이려면 나를 먼저 죽이라"로 격렬하게 반발했던 전 대사헌 홍무적이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홍무적은 이에  남해현으로 옮겨졌으며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해 귀양갔던 이경여도 북쪽 변경으로 옮겨졌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어야 했던 석철은  인조25년 7월, 12세의 어린 나이에 죄수의 
    몸으로 제줃에 도착했다. 이날 사관은 인조의 이런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  <인조실록>에 덧붙였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석철은 과연 다음해 9월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석철의 일은 내가 매우 놀라고 슬프게 여기도 있다. 중관을 내려보내  그의 시신을 호송해 
    아비 곁에 자사지내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사관은 인조를 직법 비난하고 있다.
    "석철이 역강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닌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에 귀양 보내 결국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 장사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인조실록>은 석철의 죽음을 풍토병 때문이라고 기록했으나 당시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인조가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인조가  청에서 석철을 키운 후 자신을 폐위시키고 
    석철에게 왕위를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의 사신들이 돌아갈 때 소현세자의 묘에 
    들어 참배하는  등 소현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으므로 인조는  석철을 더욱 두려워했다. 비록 석철이 
    독살이 아닌 풍토병으로 죽었다 해도, 이는 어린 손자를 사지로 몰아넣은 인조에 의한 타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 석린도 석 달후 형을따라 세상을 버렸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진 인조는, 그 책임을 나인  옥진에게 돌려 
    여러 차례 고문해 죽여버렸다. 석철과 석린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옥진은 두 아이가 
    죽은 것은 토질 탓이지 보양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고 반발했으나, 인조에게 필요한 것은 
    두 손자의 죽음에 쏠린 내외의 의혹을 돌릴 희생양이었지 진실이 아니었다. 강빈은 억울하게 
    죽은 지 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숙종 44년에 이르러서야 복위 선시되었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그야말로 조선의 꿈과  좌절이었다. 
    소현세자가 순조롭게 즉위하여 청국에서 익힌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정사를 펼쳤다면, 인조의 쿠데타로 야기된 그 모든 국난들은 
    긍정되고 오히려 옥동자를 낳기 위한 사고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반저의 주역들이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원손마저 제거함으로써 
    소현세자의 꿈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조선을 개혁의 나라, 개방의 나라로  만드려던 선진적인 꿈은,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석철과 함께 차디찬  지하에 묻히고 만 것이다. 
    소현세자가  데려온 천주교 신자인 청나라 환관들은 청나라 사신과 함께 돌아갔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이들 청나라 환관들이 돌아감으로써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한 주자학  유일사상의 나라로 남게 되었다. 
    그 밀폐된 공간과 정지된 시간을 채운  것은 인조반정의 후예들인 
    소중화주의자들의 사대주의와 예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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