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현세자
■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소현세자에게 북방길은 분명 위기였으나, 조선으로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중국에서조차
이미 끝나가는 성리학을 금지옥엽 모시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사고방식을 깨트리고, 또한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판서 남이웅, 좌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노, 보덕 이명웅, 필서 민응협 등의 수행원들과
북방길에 오른 세자는,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만주의 심양에 자리를 잡았다. 세자 일행은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지어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를 심양관(瀋陽館)이라 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즉 소현세자는 사실상
주청(駐靑) 조선 대사였고 심양관은 조선 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워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청에 관한 일들을 미루었다.
소현세자가 처리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응하는
것이었다. 청은 당시 명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명과의 전투에 투입할 조정군 파견을
요구했다. 이는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정권에게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청의 요구에 쫓겨 재위 18년 4월에 임경업과 이완이 이끄는 조선수군 6천 명을 파병했다.
하지만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서울을 점령한 틈을 타서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을 제안할 정도의 반청인사였으니,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고 명의 전선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발포하더라도 엉뚱한 곳을 향해 쏘고 배를 일부러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일으켜 청나라의 분노를 샀다.
분노한 청나라는 이를 조선의 배신 행위로 규정짓고 청나라 장수 용골대 등을 조사단으로 삼아
의주에 파견했다. 조서은 병자호란 때 용골대에게 회되게 당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형편이되었다. 이때 세자는 용골대의 동향을 미리 조선 조정에 알려주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처지를 설득하는 등 양자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한 번은 용골대가 "청과 다른 의논을 하는 자가 누구냐"며 세자를 협박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세자는 벌컥 화를 내며,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호통쳤다.
이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했을 정도로 소현제자는 담도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 20년에는 부사 이계가 감사 정태화의 명을 받아 조선 해안에 출몰한 명나라 배에 몰래 쌀과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용골대가 이계 등을 만주의 봉황성으로 불러 세자와
함께 심문했는데, 세자는 시종일관 조선 관리들을 옹오했다. 이에 용골대가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처럼 비호해주니 그와 한마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중요한 것은 성리학이 제공하는 명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현실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자는 심양에 오기 전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병자호란 5년 전인 인조9년에 견명사
정두원이 가져온 서양의 화포와 망원경, 자명종 등을 보고 서양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세자는,
심양에 와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소현세자가 보기에 중원의 대세는 이미 청으로 기울고 있었다.
만주에서 흥기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즉위 후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각지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중 비교적 큰 세력은 도적이 되어 떠돌아다니며서 명을 위협했다. 사실상
명을 망하게 한 것은 청이라기보다는 이들 농민 반란군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역졸 출신의
이자성이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세력만 있으면 황제를 자칭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한 특징인데, 이자성 또한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를 대순황제라 칭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북경이
함락되던 날 황제의 외척과 귀족, 재상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유적의 흙발에 차이면서도,
농민 출신 이자성을 성천자로 받들고, 자결한 의종 숭정제를 저주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이렇듯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받들어 모시던 명나라는 이미 명나라의 황손들도 버린 나라였다.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오삼계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나라 진영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급히
북경으로 향하는 바, 차제에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좋겠다."
청과 연합전선을 결성해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이었으나,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는 이 말은
사실상 항복선언이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데려왔던 청의 구왕 다이곤은 즉각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이곤은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은 어린 청 세조를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
"인의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
명목은 명,청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잡혀 온지 7년째 되던 해인 1644년4월이 일이었다. 이때 구왕 다이곤은 자국의 왕과 장수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남정길에 올랐다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은 구왕의 의도적인 행위였다.
남정군을 따라간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마지작 정예군인 오삼계 군단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명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반면 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이미 중원의 정세가 청으로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던 소현세자는 오삼계 군단의 항복 장면을
목격한 후, 조선이 취할 외교정책이 승명대의가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현실외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청군은 남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북경에 입성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점령해 간 것이다.
청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항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갔고, 이로써 청은
명의수도였던 북경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자성은 청에 갖다 바치기 위해 애써 북경을 함락한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북경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주씨네 떡가루로 이씨가 쪄낸 빵을, 이웃 조서방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이는 주씨의 명 왕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이, 결국 조씨를 국성으로쓰는 만주의 청에게 고스란히
빼앗긴 것을 풍자한 노래였다.
이를 지켜본 소현세자의 심정은 담담했다.
소현세자는 이미 7년 간의 볼모 생활을 통해 이런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
인조 18년 임경업이 명과 싸우지 않고 사실상 투항했을 때,
세자가 놀랐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세자가 보았을 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조선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세자는 볼모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 정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인식은 조선의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비춰졌다.
■ 부정아닌 부정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 온지 3년째 되던 해인 인조18년, 부사 이경헌과 서장관 신익전이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니 세자를 일시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과 세자를 바꾸자고 요청했는데, 청은 이 제의에 대해
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도 인평대군과 함께 보내라고 요청했다.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부른
후에야 소현세자를 일시 귀국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청은 세자의 귀국을 두려워했다. 청은
구체적으로 인평대군과 원손을 만주의 봉황성에서 맞바꾸자고 제의했는데 조선은 이를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청의 구왕 다이곤과 질가왕은 소현세자를 위로하기 위한 송별연을 열어주었고, 인조 18년
2월 12일에는 청 황제 태종도 직접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이 자리에는 봉림대군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태종을 만나기 전 뜰 안에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흥망룡의를 주면서
입으라고 했다. 이를 본 세자는 깜짝 놀라 사양했다.
"이것은 국왕이 입는 장복입니다."
용골대가 세자의 사양하는 뜻을 전하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대흥망룡의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파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조선으로 연결되었다. 세자 빈객 신득연이
이 상황을 자세히 적어 인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임진왜란때 선조가 명이
자신을 폐하고 광해군을 세우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처럼, 청이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세자는 청 태종의 송별연 다음날 심양을 떠나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 인조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었으나,
인조의 마음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인조는 노정밖에서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 관원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주청도 거부했다. 인조는 세자를 맞이하는 모든 의식을 폐지시켜버렸다. 심지어
"4년 만에 돌아오는 세자의 행차가 어떤 일인데 이렇게 간략하게 한단 말입니까"라고 호소하는
대간들의 청마저 거부했다.
다만 인조 18년 3월 7일 서울에 도착한 세자가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자, 인조도 눈물을 흘리며
맞은 것이 유일한 환영이었다. 세자의 눈물이 기폭제가 되어 인조는 물론이고 대신들도 눈물을 흘려
조정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세자를 감시하러 따라온 처의 오목도 이를 저지하자 인조가 설명했다.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저절로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의 눈물을 직접 대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의심이 부정에 녹은 것일까?
세자는 그해 4월 2일 다시 청나라도 떠나게 되었다.
심양에는 꿈에도 그리워했던 원손 석철이 있다는 사실이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심양에 도착한
세자에게 청의 범문장이 그해 6월말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원손도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자.
세자가 "날씨가 몹시 덥고 아이가 병이 있으니 서늘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출발시키려고 합니다."
라고 말렸던 것은 부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범문정은 황제께서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니 시기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비운의
세자와 원손은 이국의 수도 심양에서 부자간의 정을 나눌 사이도 없었다. 청에서 조선에 군사
징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해 1월에는 전 판서 김상헌과 전 지평 조한영 등이 목에
철쇄를 매고 두 손이 결박된 채 심양에 끌려와 심문을 받게 되어 세자는 쉴 틈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인조 21년에는 전 정승 이경여와 선조의 부마인 동양위 신익성, 그리고 전 판서
이명한 등이 심양에 끌려와 목에 칼을 차고 두 손이 결박된 채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세자는 조선 편에 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볼모 신분인 세자의 역할은 한계가
있어서 조선인이 주어갈 때마다 세자 또한 한탄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왕 인조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인조 21년 10월 역관
정명수가 청이 세자를 귀국시키려 한다고 전하자, 인조는 처와 세자가 결탁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인조가 세자 귀국 문제를 비변사 당사에게 논의하자, 정태화는 "청에서 먼저 말을 꺼냈는데 우리가
청하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의심할 것"이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주청한다. 이처럼 세자의 귀국을
두고 근심하는 데서 이미 세자를 보는 인조와 조신들의 마음이 달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청에 대한 인조의 대답은 이렇다.
"청인이 내게 입조를 요구한 것은 전한때부터였으나 내가 병이 있다고 이해시켰기 때문에 저들이
강요하지 못하였다. 이제 듣건대 구왕은 나이가 젊고 강퍅하다고 하니 그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전일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니
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그랬다. 인조는 구왕 다이곤과 세자가 결탁해 자신을 볼모로 불러들이고 세자를 조선의 국왕으로
봉할 것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인조의 이런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신하들이 아니었다.
심열이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니 신하가 어찌 감히 우러러 세자의 귀국을 청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다음달 심양에서 온 중관을 만난 뒤 인조의 의혹은 더욱 커진다.
"세자가 아무리 빨리 돌아오고 싶어도 우리의 인마가 들어간 후에야 나올 수 있을 것인데
역관 정명수의 말을 전해 들으니 세자가 돌아올 시기가 가까운 듯하다. 명수의 말이 이처럼 쉽게
나오는 것은 내 추측이 허망한 소리가 아니라면 반드시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 있을 것이다."
인조가 염려하는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란 자신을 폐위시키고 세자가 즉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이런 뜻을 알아차린 감자점이 답했다 .
"성상은 항상 이를 염려하시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세자께서 나온 뒤에 만약
뜻밖의 변이 있다면 군신 상하가 어찌 손을 묶어 두고 그들이 하는 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청에서 인조을 폐위하고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군신 상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으니, 인조의 불안감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그러나 청이 인조를 폐하고 세자를 세우려
한다는 생각은,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의 의심일 뿐이었다. 청은 원손을 비롯해 세자의 여러
아들들을 청으로 부른 후 만주의 봉황성에서 세자와 맞박꾸자고 제안했다. 이번의 귀국은
세자반 강씨의 부친인 영중추부사 강석기가 인조 21년 6월 사망했는데도 세자빈이 아직 곡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청한 것이었으므로 세자 부부가 동행했다. 세자와 세자빈은 인조22년
1월 초하루 자신들 대신 볼모로 들어온 원손과 아들들을 봉황성에서 만났다. 아들들을 볼모로 잡고
곡을 하러 떠하는 상황이니 눈물의 상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의 만남을 감시하던 청나라 사람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볼모 생활 중에서 부친이 사망하여, 곡도 하지 못한 세자빈의 한은 컸다.
그러나 원손과 다른 아들들을 볼모로 잡히고 귀국한 세자빈은 부친의 빈소에 곡을
할 수가 없었다.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는 곡을 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온 며느리의 빈소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왕의 이 가혹한 조치에 삼공이 모두 "세자빈의 돌아갈 기일은 임박했는데
어버이를 살펴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라며 세자빈 강씨의 빈소행를
허락해달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거부했다. 삼공은 거듭 청했다.
"세자께서 귀국을 청할 때 세자빈의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이유로 삼았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펴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나라가 그 말을 들으때 반드시 의하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빈 강씨는 끝내 빈소에 곡도 하지 못하고, 병중인 모친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조 22년 2월 초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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