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현세자
■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잊을 만하면 출연자만 바꿔 재탕 삼탕을 하는 우리나라 텔레비젼 역사드라마의 단골 주제는
연산군과 장희빈이다. 그러나 이들의 삶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의미도 있으며 무대도 드넓은 주제가
소현세자이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 치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그 뒤에 존재하는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비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만큼 소현세자는 잊혀진 인물이다.
그가 만약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면 이후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런 국제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는 삼전도 치욕의 이후 이조를 대신해 청나라로 끌려가, 초기청의 수도였던 만조의 심양에서
9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볼모로 보냈다. 조선의 세자가 볼모가 된 것 은 조선의 마지막 세자 영친왕과
소현세뿐이다.
소현세자를 독살한 혐의자가 부왕 인조라는 점은, 그의 심산한 일생을 한마디로 축약해 보여준다.
<인조실록>에따라 그의 죽음의 현장에 가보면, 9년여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한 두 달 후인 인조 23년 4월23일 이었다. 어의 박군이 진단한 세자의 증세는 학질이었다.
그런대 장년의 세자에게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학질을 치료한 인물이 문제의 의관 이형익이다.
약방에서는 다음날 새벽 인조에게 이형익을 시켜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고
인조는 그 말에 따랐다. 그날 <인조실록>은 화성이 적시성을 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세자가 발병한 다음날인 34일부터 침을 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도 세자는 침을
맞았는데 그 다음날일 26일에 그만 덜컥 세상를 떠나고 말았다.
세자의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도 9년을 너끈이 버틴 세자가 학질 따위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학질에 침을 맞다 죽은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근런데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정사인 <인조실록>23년 6월27일자에도 나온다.
소현세자의 졸곡제기사중 세자의 시신 상태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것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파문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기본 자료인 사초에서
비롯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실록은 함부로 적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게다가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라고 목격담의 출처까지 적어놓았으니, 실록의 이 내용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정말 독살된 것일까? 또한 그렇다면 왜 볼모 생활 중의 심양에서가 아니라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고국에서 독살당해야 했을까? 그 의문을 추적해보자.
■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인조 15년 1월30일 50여명의 사람들이 통곡을 하면서 남한산성을 나왔다.
의장도 없는 신하의 행렬속에,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에 올라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였다. 그 초라하고 굴욕적인 행렬속에는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도 있었다.
산성을 내려온 인조는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박힌 자리를 펴고 앉아 대죄했다. 인조와 소현세자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의 인도에 다라 삼전도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황제를 나타내는
황옥을 펼치고 않아 있었고, 주위에는 활과 칼로 무장한 갑옷 차림의 장수들이 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한 가운데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인조가 손수 걸어 지 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나와 진문 동쪽에서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용골대가 진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 청 태종의 말을 대신 전했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인조가 답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용골대가 단 아래 북면하는 쪽에 자리를 마련했다. 북쪽을 바라보는 곳은 신하의 자리이고 남쪽을
바라보는 곳은 임금의 자리이다. 인조는 그 자리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삼배구고두례가 끝나자 인조를 단 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청 태종은 남면하고
인조는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다. 또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서쪽을 향해 나란히 앉고
소현세자는 그 아래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조선의 두 대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그아래에 앉았다.
청 태종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무력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에 맞서 청의 콧대를 꺽을 무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위솔 정이중이 나서서 다섯 번을 쏘았는데 활과 화살이 조선과
다르므로 모두 맞지 않았다. 이에 만족한 청에서는 떠들썩한 술판을 벌였다. 잠시 후 인조가 완전한
항복의 표시로 도승지를 통해 국보를 받들어 올렸다. 당사자인 인조는 물론 소현세자, 봉림대군 모두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으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치욕이다 .
■ 볼모로 가는 두 형제
삼전도의 치욕은 병자호란때 패전의 결과였으나 사실 그 뿌리는 인조반정에 있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폐모론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일으킨 것인데, 성격상
연산군의 학정에 항거해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랐다.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정사는 국가나
백성들의 자리에서 볼 때는 탁월한 것이었다. 인목대비와 서인의 처지에서는 광해군의 정사가
패륜이었을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늘상 벌어지는 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따라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에게는 인조반정이 희소식이 었겠지만, 광해군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임진왜란의 참화 극복에 전력을 바쳐야 할 시기에 벌어진 지배층 내부의 불필요한
정치적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반정 직후 일등공신의 한사람인 이서의 회고를 보자.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 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 이원익이 적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으로서는 인심을 수습할 명분과 사람이 없어, 남인 정승 이원익이 명망을
빌려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서인 정권이 겨우 위기를 수습한 반정 다음해인 인조 2년에는
내부 분열인 이괄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괄은 반정의 주역이면서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 안은 만주에서 여진족의 통일 기운이 높아져 국경
수비에 치중해야 할 시점에 발생해 북방 국경을 크게 약화시켰고, 더욱이 정묘, 병자 양 호란때
조선군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반정 후 서인 정책의 핵심 방향은 광해군 정권의 모든 거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 중요한 것이 바로
외교정책의 변화였다. 광해군의 명,청 중립외교에 대한 반정정권의 인식은 인조의 즉위를 허락하는
인목대비의 즉위 교서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년으로,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해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어 선왕께서는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정정권이 급격하게 반청정책을 전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반정 당시
중국대륙은 후금, 즉 청나라와 명나라가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이런
긴장 상태에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면서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이
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후금은 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중원을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묘호란은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는 정묘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당시 청은 명과 조선 모두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습책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정묘조약 9년후인 인조 14년에 청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나선 것은 조선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인조와 서인정권이 이를 거부하려면
정묘조약 이후 9년동안 그만한 힘을 길었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정권은 국방력 대신 명분만 쌓았고,
그 명분에 의하면 청을 천자국으로 모실 수 없었다. 청을 천자국으로 받드는 것은 반정 명분
자체를 부인하는 자기 모순이었다. 인조는 8도에 선전 교서를 내렸다 조선 백성보다도
'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를 더 큰 목소리로 주창한 이 선전 교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목청뿐인 허세에 대한 청의 대답은 군사 공격이었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 이후 조선은 군사력을
가질 수 없으며,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해 봉림대군 등 왕자들을 볼모로 끌고 가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화의 조건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삼전도의 항복 5일 후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잡혀 가기 전 하직 인사를 하러 대궐로 돌아왔다. 이때 배웅하던 신하들이
모두 길가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한 신하가 말의 재갈을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는 말을 멈추고 함참 동안 그대로 있기도 하였다.
청과의 화의조약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이 세자의 볼모 문제였다. 척화파는 모두 전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세자를 청나라에 내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강화파라 해도 세자가 볼모로 가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문제의 해결은 실로 난감했다. 이때 이 난제를 해결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소현세자 자신이었다.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전하라."
볼모 문제는 소현세자가 이처럼 스스로 청 진영에 나아가기를 자청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진 이 결정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조선 지배층 대다수는
국가의 안전보다 일신의 안전을 더 중시했다. 청이 세자와 대군 이외에도 판서의 아들을 인질로
원하자, 평소에는 아귀처럼 관직에 달려들던 관료들이 서로판서를 맡지 않으려고 다투었다.
실제로 호조판서 김신국이 내외의 비판을 모른 체하면서 병을 핑계대고 사직을 청해 이경직이
대신 임명되기도 했다. 세자가 끌려가는 판국인데도 고위관료들은 나라보다는
집안을 더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 태조의
열네 번째 아들인 구왕과 함께 멀고 먼 북방길을 떠났다. 인조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의 창릉
(昌陵: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서쪽까지 거동해 전송하자 구왕이 말했다.
"멀리 오셔서 전송하니 실로 감사합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대왕꼐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세자의 연세가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세자와 봉림대군이 절을 하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엎드려 분부를 받은 세자는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만류하며 말했다.
"주상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오. 각자 진중하도록 하시오."
마침내 소현세자는 언제 돌아올지는 물론 살아 돌아올 기약도 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봉림대군의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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