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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한비자 (韓非子)중국의 고전 /사상과 처세 2019. 2. 7. 17:21
217. 한비자 (韓非子) / 저작자 한비(韓非)
BC 23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법가 사상(法家思想)을 진(秦)나라의 시황제에게 제공한 반(反)유가의 선봉이자 법가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한(韓)나라의 귀족이었던 한비의 저작으로, 그는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배운 뒤 조국 한나라의 번영을 위해 법가 사상을 대성했다. 원래는 본명이나 책 이름이 모두 ‘한자(韓子)’였으나, 후세에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도 한자(韓子)로 불리게 되자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한비자라 부르게 되었다.
『사기』의 「한비전(韓非傳)」에 따르면, 한비(?~BC 233)는 소국인 한나라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다. 한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1) 의 하나였지만, 국토가 좁고 진나라와 초나라라는 강대국의 압박을 받아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웠다. 한비는 부국강병을 위한 학문을 배우기 위해 그 무렵의 대표적 학자였던 순자의 문하에 들어갔다. 동문으로는 훗날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李斯)가 있었다. 한비는 순자의 ‘성악설’과 노자의 ‘무위(無爲)’에서 철학적 계시를 받고, 상앙(商鞅)의 ‘법’과 신불해(申不害)의 ‘술(術)’을 종합해 독특한 통치 이론인 ‘법술(法術)2)’을 이끌어 냈다.
한비는 이 ‘법술’이야말로 부국강병의 유일한 길이라고 한나라 왕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나라에는 벌써 천하통일을 지향하는 기개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그의 ‘법술’을 채용한 것은 진나라 왕인 정(政, 뒷날의 시황제)이었다. 어느 날 정은 한비의 저작을 읽고 감탄했다. 그래서 저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자 이사가 꾀를 썼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략하자, 한나라는 한비를 사자로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진나라 왕은 한비를 만났지만 그를 바로 등용하지는 않았다. 한편, 이사는 옛날에 동문수학한 한비의 천재적인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등용되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해 경계했다. 결국 그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한비를 참언해 옥에 가두었다. 이사는 옥중에 독을 넣어 보냈고, 한비는 어쩔 수 없이 그 독을 마셨다고 한다(BC 233).
그 뒤 3년이 지나 한나라는 멸망했고, 10년 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정은 스스로 시황제라 칭했다. 시황제의 정책은 모두 한비의 법가 사상에 따라 세워졌다. 그래서 시황제를 한비의 제자라고 하는 것이다.
『한비자』는 5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두를 한비가 직접 집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체가 법가 사상으로 통일성을 갖추었으며, 한비의 사상을 잘 전한 글로 평가받는다. 최근 중국에서는 법가가 시대의 사상으로 재평가되어 『한비자』와 관련된 주석서와 연구서가 많이 출판되고 있다.
1) 전국시대 때 중국의 패권을 놓고 대립한 7대 강국. 동방의 제(齊), 남방의 초(楚), 서방의 진(秦), 북방의 연(燕), 그리고 중앙의 위(魏) · 한(韓) · 조(趙)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각국은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려고 내정의 충실과 군비의 확장에 진력했는데, 이 중 진나라는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이후 국력이 신장해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2) 법률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
■ 군주는 법(法)과 술(術)로 통치한다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서 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이루어 다른 나라와 싸워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가 강력한 통치력을 가져야 한다. 군주가 힘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적인 감화력(덕)으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난세에 맞지 않다. 군주 자신이 견고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 요소요소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평범한 군주라도, 그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이러한 체계적인 방법이 바로 ‘법술’이다.
법술의 ‘법’이란, 명문화하여 백성에게 제시하는 것, 곧 법률이다. 법은 철저하게 널리 알려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술’을 도입한다. 이것은 군주가 가슴에 새겨 두고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속내를 들켜 버리면 아무런 효과도 없다.
‘술’이란 한마디로 신하에 대한 군주의 통치 기술이다. 이 경우에 신하란 군주를 모시는 모든 사람의 총칭으로 보아야 한다. 위로는 대신에서 아래로는 일반 관리, 때로는 백성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군주는 신하들이 경애심을 가지고 자신을 받들어 모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서는 안 된다. 신하라는 존재는 자신의 이익밖에 모른다. 그들은 군주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하 노릇을 할 따름이다. 따라서 군주의 힘이 약해지면 군주의 지배권을 배제하려고 한다. 그것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군주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이다. 그들은 군주에게 인정받는 후(后)일 수도 있고 후계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일 군주가 총애를 거두어 버리면 그들은 하루아침에 다른 신하와 똑같은 신분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불안에 사로잡혀 있고, 군주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자신의 지위를 확보해 두려 한다. 그런 욕망이 강해지면 독이나 자객을 써서 군주를 죽이려 할 것이다.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많은 집안싸움은 모두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군신 관계를 염두에 두었을 때 과연 신하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까? 먼저 신하의 실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유능하고 뛰어난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며, 나아가 서로의 허물을 감싸 주면서 군주의 눈을 가리려 한다. 군주는 여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밀고를 장려하고, 밀정을 활용해 수시로 정보를 모으는 한편, 개별적인 능력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불시에 질문을 던져 그 반응을 살펴보는 시험이 필요하다.
그런 식으로 실태를 파악한 다음, 2개의 손잡이로 신하를 마음껏 조종해야 한다. 2개의 손잡이란 무엇인가? 바로 상과 벌이다. 군주는 상벌의 집행권을 절대로 남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기에 백수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가 그 이빨을 개에게 준다면, 개가 백수의 왕이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과 벌이라는 2개의 손잡이를 가져야만 군주일 수 있다. 이것이 없다면, 군주는 이름뿐인 존재가 되어 그 자리를 위협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벌도 그저 기분에 따라 주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확한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운용할 때만이 비로소 상벌의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형명참동(形名參同)’의 방법을 구사해야 한다. ‘형명’이란 무엇인가? 형(形)은 곧 형(刑)으로, 사물의 실체를 말한다. 명(名)이란 그 ‘형’에 따르는 명칭(말)이다.
‘형명참동’의 구체적 운용법은 다음과 같다. 신하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 미리 무엇을 하려는지 신고하게 한다. 그 말이 바로 ‘명’이다. 그리고 일이 끝날 단계에서 그 성과를 조사한다. 이것이 명(신고)에 대한 형(실제의 성과)이 된다. ‘형’과 ‘명’을 ‘참동(서로 비추어 보다)’하는 것이 바로 ‘형명참동’의 뜻이다.
‘형명참동’의 좋은 예로 한나라 소후(昭侯)의 일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소후는 술에 취해 그 자리에 꼬꾸라져 잠들어 버렸다. 주군이 감기가 걸리면 큰일이라며 곁에 있던 관(冠) 담당 관리가 옷을 덮어 주었다. 눈을 뜬 소후는 자신을 덮고 있던 옷을 보고 기쁘게 생각했지만, 이내 옷을 걸쳐 준 자가 관 담당자라는 것을 알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소후는 거기에 대해 두 가지 처분을 발표했다.
첫째, 옷 담당자에게 벌을 내렸다. 그가 자신의 직분(곧, 이러한 일을 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명에 해당함)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관 담당자에게도 벌을 내렸다. 그가 자신의 직분을 넘어선 행동(‘형’이 ‘명’을 넘어선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그냥 두더라도 두 번째의 경우, 곧 신고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경우에는 벌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해악은 첫 번째의 경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명’과 ‘형’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둘 다 같은 죄를 범했고, 월권 행위의 해악은 약간의 성과로 상쇄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형’과 ‘명’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형명참동’의 요점이다. 중요한 것은 성과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신하를 잘 통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군주의 권위가 서고, 불패의 강국을 실현할 수 있다. 「이병편(二柄篇)」, 「비내편(備內篇)」 외
■ 법을 기반으로 군주의 권위를 확립
유가는 요(堯) · 순(舜) · 탕(湯) · 무왕(武王) 등 고대의 성인(聖人)들을 높이 찬양하고, 그들의 행위를 본받는 것이 위정자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예를 들면, 유가는 고대의 성인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음을 칭송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위정자도 거친 음식을 먹고 초라한 옷을 입었으며 스스로 백성들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하지 않는가. 설령 왕이라 하더라도 문지기와 같은 생활을 하고 노예처럼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왕은 물론이고 현의 지사급만 되어도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마차를 타고 다닌다.
이렇게 옛날의 왕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지사가 자리에 매달리는 것은 그 실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옛날에는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지금은 재물을 모으려 하는 것은 딱히 유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도덕이 땅에 떨어져서가 아니다. 옛날에는 재물이 남아돌았고, 지금은 재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새로운 시대의 정치는 양(量)이나 이익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바, 고대의 성인을 본받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유가는 전쟁도 정치도 힘에 의존하지 말고, ‘인(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전쟁에 대해 살펴보면, 순이나 문왕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적을 회유한 적은 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무력은 점점 확대되었고, 입으로 ‘인의(仁義)’를 주장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옛날에는 도덕을 다투고 이어서 지략을 다투다가, 지금은 힘의 우위를 다투고 있다. 아무리 ‘인의’를 외쳐 본들, 상대가 힘을 구사하면 꼼짝도 할 수 없다. 이쪽에서도 힘으로 대항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정치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가가 주장하는 ‘인의’에 의한 정치란, 다른 말로 사랑과 정의에 따른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근원은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조차 반드시 관계가 원만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깊고 넓다 한들 사랑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 또한 백성은 정의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며 천하를 유세하던 시절조차도 그의 사상에 감복하여 따른 제자는 고작 7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노(魯)나라 애공(哀公)은 평범한 군주였지만, 일단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모든 백성이 그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권위에 복종했으며, 공자도 그 신하가 되었다. ‘인의’라는 점에서 보자면 애공은 공자의 발바닥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군주가 되어 권위의 힘을 갖게 되자, 모든 백성을 복종시키고 공자도 신하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런데 유가는 군주에게 권위의 힘을 사용하라고 권하지 않고, ‘인의’를 펼쳐 천하의 왕이 되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군주에게 공자와 똑같이 되라는 말과 같고, 백성 모두에게 공자의 제자가 되라는 말과 같은데, 이는 실현될 수 없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법을 기반으로 군주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 이외에 난세를 살아갈 방법은 없다. 그런데도 유가의 학자들은 잘못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으며 세상을 현혹하고 있다. 그 결과 입으로만 말하고 실천을 등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온통 책을 읽으며 논쟁을 벌이는 자들뿐이고, 실제로 호미와 쟁기를 들고 일을 하거나 무기를 드는 자가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힘이 약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이러한 풍조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책이 아니라 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성인’이 아니라 관리를 선생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왕업의 기초가 완성될 수 있다. 「오두편(五蠹篇)」 외
■ 군주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간언하라
법술사(法術士), 곧 법술을 주장하는 개혁가는 끊임없이 반대 세력의 방해를 받는다. 반대 세력이란 군주를 둘러싼 중신이다. 그들 중신은 한통속이 되어 군주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실권을 장악해 버린다. 법술을 도입해 군주의 권위를 세운 뒤에는 맨 먼저 이 같은 중신들을 몰아내야 한다. 그들은 법술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이리하여 법술사와 중신 사이에는 숨 막히는 투쟁이 전개된다. 과연 법술사에게 승리의 가능성은 있을까? 법술사는 군주와 멀리 떨어져 있고, 상대는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쪽은 신참이요, 상대는 고참이다. 이쪽은 군주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상대는 군주의 비위를 맞춘다. 이쪽은 보잘것없는 직위이고, 상대는 유력자이다. 이쪽의 무기는 혀 하나뿐이지만, 상대는 나라를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상대와 직접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 법술사는 군주에게 직소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군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군주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모든 신하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다. 게다가 권력의 정점에 있기에 늘 불안해하며, 소심하면서 잔인하기도 하다.
이런 상대에게 진언하려면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직언을 서슴지 않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고 거기에 대응해 이쪽의 의견을 정리해 알리는 일이다.
상대가 명성을 중시하는지 또는 실리를 중시하는지, 아니면 본심은 따로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잘 알아보고 진언해야 한다. 상대가 비밀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그것을 건드려서는 안 되며, 이쪽의 지식을 전부 드러내서도 안 된다. 또한 상대의 능력 이상을 실행하도록 권해서도 안 된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때로는 완곡하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예를 들어 가면서 임기응변으로 진언해야 한다. 「고분편(孤憤篇)」, 「세난편(說難篇)」 외
□ 책 속의 명문장
逆鱗 / 역린
용이라는 동물은 성질이 온순해 잘 길들이면 타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용의 목 밑에는 지름이 한 자나 되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어, 만일 그것을 잘못 건드리면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이처럼 군주에게도 거꾸로 박힌 비늘 같은 것이 있으니, 진언하는 사람은 그 비늘을 건드리지 않기만 해도 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는 신하의 입장에서 진언을 할 때 군주의 약점이나 아픈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윗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역린을 건드린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 「세난편」
守株 / 수주
송나라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토끼가 달려가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그것을 본 농부는 쟁기를 버리고 그 나무를 지키며(守株) 다시 토끼가 걸려들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토끼는 얻지 못하고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
한비는 이 비유를 들어 고대 성인의 방법을 고집하는 유가의 어리석음을 비판했다. 즉, 옛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므로 그 시대에 맞는 통치법을 배우고 구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주’는 고루하게 옛것을 고집하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고도 한다. - 「오두편」
矛盾 / 모순
초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방패를 팔 때는 “내 방패는 단단해서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다” 하고, 창을 팔 때는 “내 창은 날카로워 어떤 물건도 꿰뚫는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그러면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오?”라고 묻자 무기 장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비는 유가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었다. 유가는 고대의 성왕인 순을 찬양해 “요가 천자일 때 순은 스스로 각지로 나아가 노동을 실천해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성인의 덕이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한비는 “요가 성인이라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을 것이니 순이 나설 여지가 없다. 만일 순이 나아가 세상의 잘못을 고쳤다고 한다면, 요의 정치에 잘못이 있었음을 나타내므로 요는 성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비유를 통해 ‘요와 순이 모두 성인이라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 「난편(難篇)」
餘桃 / 여도
미자하(彌子瑕)라는 아름다운 소년이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둘이서 같이 복숭아밭을 거닐다가 미자하가 복숭아 하나를 따 먹었는데 너무 달고 맛있어서 먹던 복숭아를 영공에게 주면서 먹어 보라고 했다. 영공은 먹는 것도 잊은 채 미자하가 자신에게 복숭아를 주었다며 기뻐했다. 세월이 지나 미자하의 용모가 추해지자 영공의 사랑도 식었다. 그러던 차에 미자하가 죄를 지었다. 그러자 영공은 “이놈은 예전에 먹다 만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적이 있다”라고 비난했다. 미자하의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지만, 영공의 사랑이 증오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평가도 정반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군주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군주라는 권력자가 얼마나 제멋대로인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비는 이런 비유를 들었던 것이다. - 「세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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