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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 / 김후직(金后稷)옛 이야기/고전 隨筆 2019. 1. 17. 12:20
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 / 김후직(金后稷)
옛날 임금은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깊이 생각하고 멀리 걱정하였으며,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들의 올곧은 간언을 받아들이면서, 모든 일에 근면하여 감히 편안하게 놀기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야 덕스러운 정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져 나라를 가히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미친 사냥꾼과 더불어 매와 개를 풀어서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달리어 스스로 그치지를 못하십니다. 노자(老子)는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1)”고 하였고, ?서경(書經)?에서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든가 밖으로 사냥을 일삼든가 하면, 그 중의 하나만 행하여도 혹 망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2)”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안으로 마음을 방탕히 하면 밖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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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도덕경(道德經)?제12장에 보이는 말.
2) 혹 망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서경(書經)? 「오자지가(五者之歌)」 편에 나오는 말.
♣해설
이번에는 짤막한 글 하나를 소개한다. 길이도 짧고 문학적 향기도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글이 삼국시대 최초의 수필(최승범), 「삼국시대의 수필」,?한국문학개론?, (혜진서관, 1991, p.546.),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로 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45 「열전」 제5 「김후직」 조(條) 및 ?동문선(東文選)? 권5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인물」 조 등에 나오는 글이다. 일반적으로 ‘서(書)’는 편지글이지만 임금에게 올린 것은 ‘주의류(奏議類)’가 되어, ?동문선?에서는 ‘주의(奏議)’로 다루었다. 최승범은 이를 “내용으로는 교훈수필, 형식으로는 서간수필로 볼 수 있다.”(상게서 p.547.)고 하였다.
지은이 김후직(金后稷:?-?)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의 충신으로 지증왕(智證王)의 증손이다.
지증왕의 이름은 지철로(智哲老),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라 하였고, ‘지증’은 시호(諡號)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에서는 ‘지정(智訂)’이라 하기도 했다. 시호는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재종형(再從兄)인 선왕이 아들 없이 돌아간 까닭에 64세의 나이로 보위에 올랐다.
‘과년(瓜年)’이라는 말이 있다. ‘과(瓜)’자에는 ‘八’자가 2개 들어 있어서 여자의 경우에는 ‘8+8’, 곧 16세를 가리키며, ‘여자로서의 구실이 시작되는 나이’라는 좋은 뜻이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8×8’의 64세를 가리키는데, ‘남자 구실 끝’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지증왕은 그 64세에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순장(殉葬)제도를 금지한 왕이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칭호의 마지막 임금이기도 하다.(다음 법흥왕[法興王]부터는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함).
지증왕은 특히 ‘음장(陰長)’으로도 유명했다. 물경 1자 5치나 되었다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배우자를 얻기 어려워 전국으로 사자를 보내었는데, 모량부(牟梁部)의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러 개 두 마리가 큰 북[鼓]만한 똥덩어리 두 끝을 물고 다투는 것을 보게 되어 물었더니, 한 소녀가 대답했다.
“이곳 상공(相公)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수풀 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보니 여인의 신장이 7자 5치나 되었다. 왕이 수레를 보내어 그 여인을 맞아들여 황후로 삼았다.
김후직은 그러한 지증왕의 증손으로 진평대왕(眞平大王)을 섬겨 이찬(伊湌) 벼슬에 올랐다가 병부령(兵部令)으로 전임된 것(진평왕 2년,580)으로 보아 지증왕 못지않게 건장한 체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평왕도 허우대가 컸던 왕이었으니, 집안 내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의 맏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요, 둘째는 김춘추(金春秋)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어머니인 천명부인(天明夫人: 시호 文貞太后), 그리고 그 셋째 딸이 향가 「서동요(薯童謠)」에 나오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선화(善花 혹은 善化)공주였다.
진평왕은 평소 사냥을 매우 좋아하여 정사를 돌보지 아니했다. 그래서 김후직이 이를 여러 번 만류하는 간언을 올렸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그는 병들어 죽을 무렵 세 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 능히 임금의 나쁜 행동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였다. 아마 대왕이 놀이를 그치지 않다가는 나라가 패망하기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근심이로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치도록 하려 하니, 모름지기 내 뼈를 대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으라!”
아들들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후일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길을 반쯤 가니 ‘가지 마소서.’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왕은 둘러보며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를 묻자, 종자(從者)들이 아뢰기를, “그것은 후직 이찬(伊湌)의 무덤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하고, 후직이 죽을 때 남긴 말을 전하였다. 대왕은 산연(潸然)히3) 말하기를, ‘그분의 충간은 죽어서도 잊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토록 깊구나. 만약 끝까지 고치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그의 혼령(魂靈)을 대하랴?’ 하고, 드디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노자(老子)?나 ?서경(書經)?의 글을 들어서 간하였던 것을 보면, 당시 도가(道家) 사상뿐만 아니라 유교 사상(儒敎思想)까지도 정치 이념으로 등장하였음을 말해 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죽은 뒤 무덤 속에서까지 왕에게 했던 그의 충간을 사람들은 ‘묘간(墓諫)’이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경주역에서 포항으로 가는 국도 곁에 그의 묘로 알려져 오는 분묘가 남아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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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연(潸然)히: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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