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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언(野言)1 / 신흠(申欽
    옛 이야기/고전 隨筆 2019. 1. 15. 19:28

    야언(野言)1 / 신흠(申欽)

     

     

     

    (전략)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한 친구를 만나면 족히 평범하고 속됨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두루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매사에 굳어져서 변통성이 없는 폐단을 깨뜨릴 수가 있고, 박학한 친구를 만나면 능히 고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마음이 높고 넓은 친구를 만나면 퇴폐하고 타락한 기운을 떨쳐 버릴 수가 있고, 마음이 차분하고 안정된 친구를 만나면 조급하고 망령스런 성격을 제어할 수 있고, 편안하고 담담하게 생활하는 친구를 만나면 농염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충분히 해소시킬 수가 있다. (중략)

     

    일은 마음이 흡족할 때 전환할 줄 알아야 하고, 말은 뜻에 걸맞을 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허물과 후회가 저절로 적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즐거움이 무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중략)

     

    책을 읽는 일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시내와 산을 사랑하는 것도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이 없으며, 꽃이나 대나무, 바람이나 달을 완상(玩賞)하는 것에도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이 없으며, 단정히 앉아 조용히 침묵하는 것도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는 일이다. (중략)

     

    생각을 곡진하게 말하고 그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생각을 다 말하지 않고 뜻을 남겨두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하루에 착한 말을 한 가지라도 듣거나 착한 행동을 한 가지라도 보거나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행한다면, 그날은 모름지기 헛되게 살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중략)

     

    꽃이 너무 화려하면 향기가 부족하고 향기가 진한 꽃은 빛깔이 아름답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부귀의 용모를 사치스레 꾸미는 자들은 맑게 풍기는 향기가 적고, 그윽한 향기가 드러나도록 자태를 내보이는 자들은 퇴락한 기색이 많은 법이다. (중략)

     

    손님은 가고 문은 닫혔는데 바람이 선들 불고 해가 떨어진다. 술동이를 잠깐 기울임에 시구가 막 이루어지니, 이것이야말로 문득 산인(山人)이 득의(得意)를 느끼는 경지라 하겠다.

    긴 행랑 넓은 정자 굽이쳐 흐르는 물에 돌아드는 꼬불꼬불한 돌 비탈길, 떨기 져 피어있는 꽃 울창한 대숲 산새들과 갈매기, 질그릇 항아리에 향 피우고 설경(雪景) 속에 선()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참된 삶의 경지요, 담박한 생활이라고 하겠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것, 이것이 세간법(世間法)이고, 할 일도 없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없는 것, 이것이 출세간법(出世間法)이다. 옳은 것이 있고 옳지 못한 것이 있는 것, 이것은 세간법이고,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는 것, 이것은 출세간법이다. (중략)

     

    찬 서리 내려 낙엽 질 때 성긴 숲 속에 들어가 나무 등걸 위에 앉으니 바람에 나부껴 누런 단풍잎은 옷소매 위로 점점이 떨어지고, 나뭇가지 끝에서 날아온 산새가 내 모습을 살피며 지나가니 황량한 대지가 맑으면서도 탁 트이는구나.

    문을 닫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맞는 경계를 찾아가는 것, 이 세 가지야말로 곧 인간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중략)

     

    어느 쾌적한 밤 편안히 앉아 등불을 희미하게 밝혀놓고 차를 달인다. 온갖 소리가 잠들었는데 시냇물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편지를 꺼내 잠깐씩 가까이 하는 일,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문을 닫고 주위를 깨끗이 정돈한 후 온갖 책들을 눈앞에 펼쳐놓고 기분 내키는 대로 뽑아서 살펴보는데, 왕래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마저도 끊어져 온 천지가 그윽하고 방안 또한 고요 속에 묻힌 상태,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텅 빈 산에 한 해가 저무는데 분가루 흩뿌리듯 소리 없이 내리는 눈, 마른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추위에 떠는 산새는 들에서 우짖는데, 방안에서 화로 끼고 차 달이며 술 익히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중략)

     

    초여름 원림(園林) 속에 들어가 뜻 가는 대로 아무 바위나 골라잡아 이끼 털어내고 그 위에 살포시 앉으니, 대나무 그늘 사이로는 햇빛이 스며들고 오동나무 그림자가 뭉실 구름 모양을 이룬다. 얼마 뒤 산속 구름이 건듯 일어 가는 비 흩뿌리니 청량감(淸凉感)이 다시 없다. 탑상(榻床)1)에 기대어 오수(午睡)에 빠졌는데, 꿈속에서도 또한 그 흥취를 얻었도다.

     

    집안일을 정리한 뒤 동자 2, 3명을 골라 따라오게 한다. 근력이 있는 자는 불 때고 밥 짓는 일을 맡기고 힘이 약한 자는 청소나 글 베끼는 일을 맡게 한다. 믿음이 가는 자손이 있으면 공양(供養)하러 보내고 서로 염려해주는 빈붕(賓朋)2)이 있으면 선물 꾸러미를 보내 문안을 통한다. 이러면 족할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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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탑상(榻牀): 걸상과 평상(平牀)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빈붕(賓朋): 손님으로 대접하는 좋은 친구.

     

     

     

    해설

     

    지은이는 어느 날 예전에 지었던 글들을 펼쳐 보다가 마음속으로 부합되는 것이 있기에, 자그마한 책자로 엮어 그 속에 나의 뜻을 곁들이고 ?야언(野言)?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야담(野談)으로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내면의 표출이 두드러진다는 말이겠으나, 넓은 의미로는 역시 야담적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야담이 수필에 속한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누구나 인정하리라고 본다.

     

    지은이 신흠(申欽:1566-1628)의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 또는 상촌(象村)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文名)을 떨쳤다. 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서는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는 선조의 유교칠현(遺敎七賢) 중의 한 사람으로 관직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기도 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우의정에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1627년 영의정이 되었다. 평소 사림(士林)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칭송되는 조선 중기 한학4대가의 한 사람이다. 이 글은 ?상촌집? 47권 외집 7에 실려 있는 야언(野言)1이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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