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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굴원 (屈原)중국의 고전 /시와 산문 2019. 1. 2. 23:45
402. 굴원 (屈原)
기울어 가는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왕에게 인정받지 못한 슬픔을 노래한 시인으로, BC 343년경에 태어나 BC 27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평(平)이고, 원(原)은 자이다.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일생을 이렇게 평했다. “흙투성이 허물을 벗고 매미가 빠져나오는 듯한 삶이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빠져나온 듯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아간 사람이다.”
중국 최초의 시집은 『시경』이다. 거기에는 황하 유역, 이른바 중원 땅의 민요가 집성되어 있다. 편집자는 공자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 하나하나의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최초의 시인은 양자강 유역, 곧 초나라 땅에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초나라에는 ‘사(辭)’라는 독특한 운문이 있었고, 굴원은 그 형식을 빌려 터질 듯한 가슴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국이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데 대한 분노와 슬픔이었다. 굴원이 살았던 시대의 중원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였다. 많은 사상가가 정치적 의견을 표현해 군주를 설득했다. 굴원의 작품은 그런 사상가의 문장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의 생애를 공자나 한비자의 삶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굴원의 작품이 들어 있는 『초사(楚辭)』의 주석서로는 주희의 『초사집주(楚辭集注)』와 왕부지(王夫之)의 『초사통역(楚辭通譯)』 등이 있다.
■ 기울어 가는 조국의 운명을 노래한 시인
전국시대는 실질적으로 진(秦)나라 · 초(楚)나라 · 제(齊)나라의 3파전이었다. 이윽고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데, 진나라를 대신할 만한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초나라였을 것이다. 굴원의 시대에는 아직 초나라에도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굴원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국내의 친진파(親秦派)와 싸우다가 패배한 정치가였다. 굴원은 초나라 왕족으로 태어나 회왕(懷王)을 곁에서 모시며 왕권 확립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그는 귀족 계급의 반발을 사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느 날, 회왕은 굴원에게 새로운 법령을 기초하라고 명령했다. 아마도 귀족의 힘을 제한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굴원의 동료 상관대부(上官大夫)가 귀족 세력을 대변해 초안의 내용을 알아보러 왔으나 굴원이 거부하자, 그들은 참언으로 회왕을 꼬드겼다. 그 때문에 회왕은 굴원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진 관료인 굴원이 지향하던 개혁 정책이 수구 세력의 반발로 좌절된 사건이라 하겠다.
이러한 대립은 외교에도 나타나 초나라 조정은 두 파로 갈라졌다. 진나라에 대항할 것인가, 양보할 것인가가 두 파벌의 쟁점이었다. 수구 세력은 친진, 개혁파는 반진(反秦)의 입장을 취했다. 이때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제나라는 초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진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의 동맹을 저지하기 위해 책사 장의(張儀)를 초나라로 보냈다. 그 결과, 진나라는 초나라와 제나라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뒤늦게 속았음을 안 회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패배해 영토의 일부마저 잃고 말았다. 여기에 이르러 회왕은 제나라와 손을 잡기 위해 굴원을 파견했다. 이런 움직임을 눈치챈 진나라는 초나라에 영토 반환을 제안했다. 회왕은 영토보다는 장의를 보내라고 요구해 결국 장의가 초나라로 잡혀 왔다. 그러나 친진파의 암약으로 장의는 간단히 석방되고 말았다. 굴원이 귀국했을 때 장의는 벌써 진나라로 돌아간 뒤였다. 진나라는 제멋대로 초나라를 농락했다.
그 후 10여 년 뒤, 진나라는 혼인 관계를 맺자는 말로 회왕을 초청했다. 친진파의 권유로 회왕은 별다른 의심 없이 진나라로 갔다가 인질로 잡혀 병사한 뒤 시체가 되어 초나라로 돌아왔다. 회왕이 죽은 뒤, 큰아들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친진파의 자란(子蘭)은 재상이 되었다. 굴원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다. 유일한 지지자였던 회왕이 적의 손에 잡혀 죽고 친진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나약한 타협 정책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자란이 이끄는 신정권에 굴원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자란은 경양왕을 부추겨 굴원 추방령을 내리게 했다. 이렇게 하여 굴원은 동정호(洞庭湖) 남쪽으로 쫓겨나 습지대를 방황하다가 결국 멱라수(汨羅水)1) 에 몸을 던졌다.
그가 죽었을 때 62세였다. 후세 사람들은 나라와 세상을 걱정했던 위대한 시인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에 투신자살한 날(음력 5月5日) 용머리로 장식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시합을 벌이는데, 이는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이날 주악(糉子)을 빚어 강에 던지는데, 이는 교룡(蛟龍)이 배불리 먹은 뒤 굴원의 시신을 해치지 말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이런 민간의 풍속으로 볼 때 굴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굴원의 문학적 공헌으로는 탁월한 창작을 통해 감동적인 애국 사상을 전파하고, 초사체(楚辭體)라는 새로운 시형을 창조한 것을 들 수 있다. 굴원 이전에는 4자가 한 구를 이루는 시경체(詩經體)가 유행했는데, 그는 남방 언어를 이용하여 시경 이래 유행했던 4자구를 3자구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혜’(兮)자 혹은 ‘사’(些)자로 두 개의 3자구를 연결시키어서 후세의 7언시와 유사한 7언구를 만들었다. 형식의 변화로 내용 역시 더욱 다양해지고, 생활의 필요에 부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형의 대변혁은 전국 말엽과 양한 시대의 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굴원의 제자인 송옥(宋玉) 경차(景差) 당륵(唐勒) 등은 물론 훗날 한초(漢初)의 가의(賈誼) 동방삭(東方朔) 장기(莊忌) 유향(劉向) 왕포(王褒) 왕일(王逸) 등도 그의 문체를 모방하였다. 이 중 도서정리 전문가였던 유향은 많은 사람들의 작품과 굴원이 남긴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했는데 이것을 초사 (楚辭)라 한다. 이는 중국 고대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권의 총집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두가지는 시경 과 소명문선 (昭明文選)임) 이 책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시경 이후 등장한 명작을 망라하여, 중국 시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1)중국 호남성(湖南省) 상음현(湘陰縣)의 북쪽에 있는 강.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이 주위(周圍)의 참소로 분함을 못 이겨 빠져 죽은 곳으로 유명함.
■ 굴원의 대표 작품들
시인 굴원의 작품은 『초사』라는 책에 「이소(離騷)」 · 「구가(九歌)」 · 「천문(天問)」 · 「구장(九章)」 · 「원유(遠遊)」 · 「복거(卜居)」 · 「어부(漁父)」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소」와 「어부」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소」는 굴원의 사상과 삶이 집약된 대표작으로 375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소’란 ‘걱정거리를 만난다’라는 뜻이다. 작자는 왕족이라는 자신의 출생 신분과 축복받은 삶을 노래한 데 이어 자신의 뛰어난 천부적 자질을 노래했다.
紛吾旣有此內美兮
나의 출생과 이름에는 벌써 아름다운 덕이 갖추어져 있었고,
又重之以脩能
거기에다 뛰어난 재능까지 타고났다네.
扈江離與辟芷兮
강리(江離)와 벽지(辟芷)를 걸치고,
紉秋蘭以爲佩
추란(秋蘭)을 꿰찼다네.
향기로운 풀처럼 내면의 덕과 재주를 겸비한 굴원은 왕을 보좌해 고대의 성왕에 비견될 만한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왕은 한 번도 굴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간신배의 참언에 눈과 귀를 빼앗기고 말았다. 강리 · 벽지 · 추란은 모두 향기로운 풀을 일컫는다. 굴원은 왕의 변절을 남녀 관계에 비유해 노래했다.
初旣與余成言兮
처음에는 나와 결혼을 약속했으면서
後悔遁而有他
후회하며 달아나 다른 이에게 마음을 주었네.
왕이 자신과 굳은 약속을 하고 개혁의 뜻을 실행하려 하다가 간신배들의 참언과 꼬드김에 마음이 날씨처럼 자주 바뀌어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걱정하고 있다. 이어서 이 지상의 삶을 포기하고 천상으로 올라가 미인(이상적인 군주)을 구하려 하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어 천상을 헤매는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문득 하계를 내려다보니 고향이 너무 그리워진다.
已矣哉國無人兮莫我知兮
아 끝인가? 나라에 인물이 없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네.
又何懷乎故都
또 어찌하여 옛 도읍지를 그리워하는가?
旣莫足與爲美政兮
이미 함께 뜻을 펼 사람 없는데
吾將從彭咸之所居
나 이제 팽함(彭咸)을 좇아가리라.
팽함은 은나라의 현신으로, 왕에게 자신의 뜻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초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각오를 드러내며 「이소」의 대미를 장식했다. 굴원은 자신의 뜻대로 팽함의 뒤를 좇아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다음으로 「어부」를 살펴보자. 글에 나타난 굴원의 모습이 너무도 뚜렷해 후세 사람이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사기』의 「굴원전」에 소개되어 굴원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屈原旣放
굴원이 쫓겨나
游於江潭
강과 늪지에서 노닐 때
行吟澤畔
그곳을 거닐며 시를 읊었네.
顔色憔悴
얼굴은 해쓱하고 그 모습 초라했네.
形容枯槁
벌써 죽음이 다가온 모습이었네.
나이 든 어부가 다가와 말을 걸자 굴원이 대답했다.
擧世皆濁我獨淸像
모든 세상 흐린데 나 홀로 맑고
衆人皆醉我獨醒
모든 사람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소.
是以見放
그래서 쫓겨난 것이라오.
그 말에 어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며 그를 비판했다.
世人皆濁
세상 사람 모두 흐리다면
何不淈其泥
어찌 그 흙탕물을 흐리게 하여
而揚其波
파도를 이루지 않으시오?
衆人皆醉
세상 사람 모두 취해 있다면
何不餔其糟
어찌 그 술지게미 씹고
而啜其釃
그 술을 마시지 않으시오.
그 말에 대해 굴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新沐者 必彈冠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新浴者 必振衣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安能以身之察察
어찌 결백한 몸으로
受物之汶汶者乎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
차라리 상강에 가서
葬於江魚之腹中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而蒙世俗之塵埃乎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그 말을 듣고 어부는 빙긋 웃고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졌다.
滄浪之水淸兮
창랑(滄浪)의 물 맑으면
何以濯吾纓
내 갓끈 빨고
滄浪之水濁兮
창랑의 물 흐리면
何以濯吾足
내 발 씻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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