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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춘추공양전·춘추곡량전 (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중국의 고전 /역사와 정치 2019. 1. 2. 23:40
102.춘추공양전·춘추곡량전 (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
저작자 공양고·곡량적 (公羊高·穀梁赤)
『춘추』는 BC 5~BC 2세기에 만들어진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연대기로, 사서오경(四書五經)에 속한다. 노나라의 사관이 남긴 기록을 공자가 정리했고, 『공양전』 · 『곡량전』은 그 주석서이다.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에서 애공(哀公) 14년까지(BC 722~BC 481)의 역사를 기술했다. 중국사의 시대 구분에서 춘추시대(BC 722~BC 403)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춘추』는 공자가 노나라의 연대기를 정리한 책으로, 그 본문(경문)은 참으로 간결하다. 그러나 유가는 이런 간결한 표현[춘추필법(春秋筆法)1) ] 속에서 공자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와 세계관을 읽어 내려 한다. 그 때문에 『춘추』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큰 문제가 되어 이미 한(漢)나라 때에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는 주석서가 만들어졌다. 노나라의 좌구명이 지었다는 『좌씨전』, 전국시대(戰國時代) 노나라 공양고(公羊高)2) 의 『공양전』, 춘추시대 노나라 곡량적(穀梁赤)3) 의 『곡량전』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좌씨전』은 역사적 사실을 중시해 『춘추』의 경문에서 그 배경에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보충해 설명하고, 거기서 어떤 평가를 이끌어 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에 비해 『공양전』과 『곡량전』은 ‘춘추필법’을 중시하고, 경문의 자그마한 표현의 차이 안에서 공자가 내세우는 대의를 읽어 내려는 방법을 취했다. 특히 『공양전』은 ‘획린(獲麟)’(기린을 잡았다)이라는 표현을 통해 『춘추』를 일컬어 공자가 미래의 혁명을 원한 책이라고 해석했다. 청(淸)나라 말기의 공양학자[公羊學者, 예를 들면 캉유웨이(康有爲)]들이 『공양전』을 ‘변혁의 서’라 하여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4) ’의 이론적 근거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공양전』의 주석으로는 후한(後漢)의 하휴(何休)가 지은 『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詁)』가 있고, 『곡량전』의 주석으로는 진(晋)나라 범녕(范寧)이 지은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를 들 수 있다. 또한 당(唐)나라 서언(徐彦)의 『춘추공양전소(春秋公羊傳疏)』와 양사훈(楊士勛)의 『춘추곡량전소(春秋穀粱傳疏)』가 있다. 이런 책들은 앞에서 설명했던 책의 주석에 다시 주注를 단 것이다. 일반적으로 『좌씨전』에 대한 주석서는 많은 데 비해 『공양전』과 『곡량전』에 대한 것은 별로 없다.
1)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사필(史筆)의 준엄한 논법을 비유해 이르는 말로, 『춘추』의 문장에는 공자(孔子)의 역사 비판이 나타나 있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경서(經書) 『춘추』와 같이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해 기록하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직필(春秋直筆)이라고도 한다.
2)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학자이다. 그가 서술한 『공양전(公羊傳)』은 4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현손(玄孫)인 수(壽)와 그의 제자 호모생(胡母生) 등이 완성했다. 『좌씨전(左氏傳)』, 『곡량전(穀梁傳)』과 함께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불렸고, 학문으로 이어져 공양학으로 번창했다.
3) 전국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곡량숙(穀梁俶)이라고도 하나 너무 많아 명확하지 않으며 자세히 알려진 사항이 없다.
4) 1898년 6월 11일부터 9월 21일까지 청나라 제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의 전면적인 지지하에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 젊은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개혁운동.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 입헌군주제와 의회 제도 및 서양의 실용 학문을 도입했으나 서태후 등 보수 세력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원년, 봄, 왕의 정월’
『춘추』는 노나라의 은공 원년 봄 정월에서 시작한다. 『춘추』의 본문은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춘추삼전’으로 불리는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은 거기에 주석을 단 것이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이 본문에 대해, ‘원년, 봄, 주왕(周王)의 정월[이것은 노나라가 주나라의 역(曆)을 사용한다는 말이고, 그러므로 주 왕실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공의 즉위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것은 섭정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석을 달았을 뿐인데, 『춘추공양전』이나 『춘추곡량전』에서는 문답체를 사용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펼친다.
『춘추공양전』
“원년이란 무엇인가?”
“군주가 즉위한 해를 말한다.”
“봄이란 무엇인가?”
“한 해의 시작을 말한다.”
“왕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문왕(文王)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 먼저 왕을 두고, 뒤에 정월이라고 했는가?”
이것은 다른 곳에서 ‘가을 7월, 천왕(天王)···’이라는 식으로 달을 앞에 두고, 왕을 뒤에 둔 것과 비교해서 묻는 말이다. 이러한 표현의 차이를 통해 『춘추공양전』의 저자는 공자의 의도를 읽어 내려 하고 있다.
“왕의 정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이란 주나라의 왕이고, 노나라가 주나라의 역을 사용한다는 것, 곧 주나라에 복종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 왕의 정월이라고 하는가?”
“통일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공(은공)에 대해서는 왜 즉위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공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위를 말하지 않은 것이) 왜 공의 의지를 나타냄이 되는가?”
“공은 노나라를 평화롭게 만들어, 그것을 환공(桓公)에게 돌려주려 했기 때문이다.”
“왜 환공에게 돌려주려 했는가?”
“환공은 어리지만 신분이 높고, 은공은 나이가 많지만 신분이 낮다. 그 신분의 차이가 미미해 노나라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 은공은 나이가 많으면서 현명하다. 중신들은 그를 떠밀어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은공은 자신이 즉위를 거부해도 환공이 반드시 즉위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환공이 즉위한다 하더라도 중신들이 어린 군주를 보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은공은 오로지 환공을 위해 즉위했다.”
“은공은 나이도 많고 현명하다. 왜 즉위해서는 안 되는가?”
“정부인의 아들 가운데서 장유(長幼)에 따라 군주를 결정할 때, 나이는 기준이 되지만 현명하고 어리석음은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 외의 자식에서 군주를 가릴 때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기준이 되고, 나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환공은 왜 신분이 높은가?”
“어머니의 신분이 높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신분이 높다고 해서 자식의 신분도 높아지는가?”
“자식은 어머니에 따라 신분이 오르내리고, 어머니는 자식 덕분에 신분이 오른다.”
이상이 ‘원년, 봄, 왕의 정월’에 대한 『춘추공양전』의 주석이다. 같은 경문에 대해 『춘추곡량전』은 이렇게 말한다.
『춘추곡량전』
“아무런 사건도 없는데 정월이라 쓴 것은 처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에 대해서 왜 즉위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공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것이 어떻게 공의 뜻을 나타내는 일이 되는가?”
“은공 자신이 공의 자리에 오를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의 자리에 오를 마음이 없었다는 건 무슨 뜻인가?”
“환공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음을 말한다.”
“환공에게 넘겨주는 건 옳은 일인가?”
“옳지 않다.”
“원래 『춘추』는 옳은 일에 대해서는 그 이룬 바를 적극적으로 기록하지만,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은공은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공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왜 환공을 미워하는가?”
“은공이 자리를 넘겨주려 했는데도 환공은 은공을 죽였다. 그러므로 환공은 나쁘다.”
“환공은 은공을 죽였다. 그리고 은공은 공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었다. 그렇다면 은공은 선한 사람이다. 그렇게 선한데도 은공이 옳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원래 『춘추』는 대의를 소중히 여기고, 감정에 흔들리는 호오(好惡)는 중시하지 않는다. 곧, 정도를 발전시키고, 사도는 억제한다는 입장이다. 효자는 아버지의 좋은 점을 내세우고, 나쁜 점은 감춘다. 선군(先君)인 혜공(惠公)이 환공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한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사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심과 싸워 이겼기에 은공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런데도 은공 자신이 선군의 사악한 뜻을 받들어 마침내 환공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사심을 완성시키는 일이 아닌가.
형제는 하늘이 정한 순서이다. 자식으로서 그 지위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제후의 지위를 군주(주왕)에게 하사받는다. 스스로 하늘이 정한 순서를 어기고, 군주와 아버지를 망각하며, 감정에 치우쳐 그 호의를 허망하게 만드는 것은 소도(小道)이다. 은공은 제후로서 자신의 책임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다. 정도(正道)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여름, 5월, 정백, 언에서 단과 싸워 이기다’
이것은 은공 원년 여름 5월 초이다. 본문은 이것뿐이지만, 이 사건은 오랜 세월 동안 정나라 왕실에서 벌어지고 있던 알력의 결말을 나타낸다. 『춘추좌씨전』은 이 집안 소동의 경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춘추공양전』
“이겼다(克)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죽였다는 것이다.”
“죽였는데 왜 일부러 이겼다고 했는가?”
“정백의 악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왜 정백의 악을 강조하는가?”
“어머니가 단(段)을 공의 자리에 앉히려 하는 것을 알고 죽였다. 그것은 그냥 공의 자리에 못 앉게 함만 못하다.”
“단은 누구인가?”
“정백의 동생이다.”
“왜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명을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나라 사람은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죽였을 때, 왜 그 사건이 일어난 지명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성에 있을 때는 설령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건이 일어난 지명을 적지 않는다. 나라를 통치하지 않은 경우에는 도성 바깥이라도 그 지명을 적지 않는다.”
『춘추곡량전』
“이겼다는 건 무엇인가?”
“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죽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왜 죽였다고 하지 않는가?”
“단에게 많은 사람이 따랐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단은 정백의 동생이다.”
“어떻게 동생인 줄 아는가?”
“세자와 같은 배에서 태어난 동생을 죽이면서 그 상대를 군주처럼 다루고 있다. 그래서 동생이라 판단하는 것이다. 단이 동생인데도 동생이라 말하지 않고, 공자인데도 공자라 말하지 않은 것은 단을 비하하기 위함이다. 단은 동생으로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걷지 않았다. 따라서 단과 정백의 패덕을 동시에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왜 정백이 나쁜가?”
“정백이 머리를 굴려서 동생을 죽일 수 있는 지경까지 몰고 갔기 때문이다. ‘언에서’라고 적은 것은 그곳이 멀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애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것과 같다. 그것을 패덕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백은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추적을 느슨하게 하여 멀리 도망치게 해 주는 것이 친족의 도리이다.”
『춘추공양전』이나 『춘추곡량전』의 저자는 『춘추』의 본문에 나타난 간결한 표현 가운데서 많은 문제점을 끌어내, 거기에서 공자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읽어 내려 하고 있다.
■ ‘봄, 서쪽 땅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다’
이것은 애공 14년의 일로, 『춘추』의 끝맺음에 해당한다. 여기에 대해 『춘추공양전』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춘추공양전』
“왜 이런 사실을 기록했는가?”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왜 이상한가?”
“우리 땅의 짐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짐승을 잡았는가?”
“나무꾼이다.”
“나무꾼은 천한 사람이다. 왜 거기에 ‘사냥(狩)’[수(狩)는 원래 천자나 제후와 같은 고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 하는 사냥을 가리키는 말이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그 일을 크게 다루기 위함이다.”
“왜 크게 다루는가?”
“기린을 잡았기 때문에 크게 다루는 것이다.”
“왜 기린을 잡는 것이 그렇게 큰일인가?”
“기린은 인수(仁獸)이다. 덕이 높은 군주가 있으면 찾아오고, 덕이 없는 군주에게는 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균(노루)같이 생겼는데, 뿔이 달린 짐승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누구를 위해 왔는가, 누구를 위해 왔는가(지금은 기린이 찾아올 세상이 아닌데)’ 하고 소매로 얼굴을 가렸고, 눈물이 그 소매를 적셨다. 안연(顔淵, 안회)이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아아, 하늘이 나를 버렸다’라고 하셨다. 자로(子路)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아아, 하늘이 나와 손을 끊었다’라고 하셨다. 서쪽 땅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잡았을 때 공자는 ‘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춘추』는 왜 은공에서 시작하는가?”
“그것은 할아버지가 들었던 내용의 범위 안에 들기 때문이다. 『춘추』는 공자 자신이 직접 본 시대, 자신이 그 무렵 사람들에게 들었던 시대, 들었던 사람에게 다시 듣게 된 시대에 따라 표현의 방식을 바꾼 것이다.”
“왜 애공 14년에서 끝나는가?”
“중요한 것은 모두 기록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왜 『춘추』를 지었는가?”
“난세를 다스려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려면, 『춘추』가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만든 것일까, 아니면 공자가 요순(堯舜)의 길을 설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일까. 요순이 공자를 예견했듯이, 공자도 후대에 기대를 품었기 때문일까. 공자는 춘추의 대의를 지어 후세의 성인을 기다렸다.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은 그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춘추공양전』은 이 ‘기린을 잡았다’라는 구절에 큰 의의를 두고 있으나, 『춘추곡량전』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춘추곡량전』
‘봄에 서쪽 땅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다는 것은 기린이 나타나자 그것을 잡았다는 말이다. 사냥을 할 때는 그 지명을 기록한다. 지명이 나오지 않은 것은 사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냥이 아니었는데 ‘수(狩)’라는 말을 쓴 것은, 기린을 잡은 것이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來)’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기린이 중국의 바깥에 있는 짐승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有)’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기린이 이 땅에 없는 짐승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춘추좌씨전』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술한다.
‘봄에 서쪽 땅 대야(大野)에서 수렵을 했다. 숙손씨(叔孫氏)의 마차를 돌보는 서상(鉏商)이 기린을 잡아 불길하다고 하여 그것을 산지기에게 주었다. 공자가 그 짐승을 보고 기린이라고 말씀하시자, 사관이 그것을 기록했다.’
이처럼 『춘추』를 주석한 ‘삼전’의 기술은 제각기 다르다.
□ 책 속의 명문장
孝子揚父之美 不揚父之惡 / 효자양부지미 불양부지악
효자는 부모의 좋은 점을 말하고 나쁜 점은 말하지 않는다.
獨陰不生 獨陽不生 獨天不生 / 독음불생 독양불생 독천불생
음과 양 하나만으로는 물질이 세상에 나지 않는다. 음과 양이 함께 작용해야 한다.
撥亂反正 / 발란반정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올바른 세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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