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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 좌구명(左丘明)중국의 고전 /역사와 정치 2019. 1. 1. 19:44
101.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 저작자 좌구명(左丘明)
BC 35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춘추(春秋)』라는 책에 좌씨(左氏)가 주석을 단 것이다. 열국의 흥망과 패권의 추이를 더듬고, 춘추시대의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춘추』의 경문(經文, 본문)에 주석이 따르는 스타일로, BC 700년경부터 약 250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했다. 전 30권.
『춘추』의 주석서로서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책에 속한다. 이 『춘추좌씨전』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일컫는데, 『춘추좌씨전』은 다른 두 책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 풍부한 사료를 기반으로 하여 경문의 배후에 있는 사실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경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설화도 많이 기록해 분량도 다른 두 책의 4배나 된다.
따라서 『춘추좌씨전』은 유가(儒家)의 경문이기는 하지만, 사상서라기보다는 역사서에 가깝다. 열국의 흥망성쇠와 패권의 향방을 비롯한 역사적 사실들뿐 아니라 사회 제도와 군사, 종교, 경제, 문화 등 춘추시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이 책의 저자는 좌구명으로 전해지나 그에 대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좌(左)가 성이고 구명(丘明)이 이름인지, 좌구가 성이고 명이 이름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또한 이 책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노(魯)나라 애공(哀公) 27년(BC 468) 이후에서 사마천(司馬遷) , BC 145~BC 86) 이전의 범위 안에 드는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이 책의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서진(西晋)의 두예(杜預, 222~284)가 쓴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를 들 수 있다. 후세의 『춘추좌씨전』 연구는 모두 이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 하 5월, 정백, 언에서 단과 싸워 이겼다
『춘추』의 본문은 아주 간단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은공(隱公) 원년(元年)] 하(夏) 5월, 정백(鄭伯), 언에서 단(段)과 싸워 이겼다.’
이 구절에 대해 『춘추좌씨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부연 설명한다.
정(鄭)나라 무공(武公)은 신(申)나라에서 무강(武姜)이라는 부인을 맞이했다. 부인은 장공(莊公)과 공숙단(共叔段)을 낳았는데, 장공을 낳을 때 부인이 난산으로 크게 고생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오생(寤生, 거꾸로 태어났다는 뜻)이라 하고 그를 미워했다. 무강은 공숙단을 군주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몇 번이나 무공에게 청했으나, 무공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장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무강은 공숙단을 위해 제(制)의 땅을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 땅은 요새와도 같습니다. 옛날에 괵숙(虢叔)1) 은 그 땅을 믿고 있다가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땅이라면 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무강은 경(京)의 땅을 요구했고, 장공이 그것을 허락했으므로 공숙단은 ‘경성대숙(京城大叔, 경성에 사는 장공의 동생이라는 뜻)’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때 제중(祭仲, 정나라의 대부)이 장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도(國都)가 아닌 도성의 성벽이 300장을 넘는 것은 나라에 좋지 않은 일입니다. 옛날의 법도를 보면, 아무리 길어도 국도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되고, 보통의 고을이라면 5분의 1, 작은 고을은 9분의 1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성의 성벽은 놀랄 만큼 길어 옛날의 법도에 비추어도 맞지 않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 난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님이 원하시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공의 어머님께서는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그 말을 모두 들어주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서둘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풀도 무성하면 다 뽑을 수 없는데, 하물며 공이 사랑하시는 아우님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괜찮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으니, 그대는 그날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 것이야.”
얼마 뒤, 경성대숙은 정나라의 서쪽 변방 고을과 북쪽 변방 고을을 자신에게 예속시켰다. 그것을 보고 대부(大夫)인 공자(公子, 지체가 높은 집안의 나이 어린 아들) 여(呂)가 장공에게 간했다.
“신하가 두 마음을 가지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게 됩니다. 공께서는 장차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나라를 경성대숙에게 양도하실 생각이라면 신은 그를 섬길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나라를 내주지 않으실 생각이라면 화근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손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경성대숙은 서쪽과 북쪽의 변방 고을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이어 그 세력을 늠연(廩延)까지 뻗쳤다.
자봉[子封, 공자 여의 자(字)]은 이렇게 말했다.
“빨리 없애야 합니다. 장차 많은 백성을 거느리게 된다면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백성이 따를 리 있겠느냐. 곧 망할 것이니 두고 보거라.”
경성대숙은 백성으로 군대를 조직한 뒤, 갑옷과 병기를 손질하고 병차 부대를 갖추어 언제든지 정나라의 도성을 공략할 수 있게 해두었다. 게다가 어머니 강씨가 그 도성에서 자신을 이끌어 줄 터였다. 그 계획을 사전에 알아챈 장공이 즉시 명령을 내렸다.
“때가 왔다! 쳐라!”
장공이 자봉에게 병차 200대를 주어 경을 치게 하자, 경의 백성들이 경성대숙 공숙단에게 반기를 들었다. 공숙단은 어쩔 수 없이 언으로 도망쳤고, 장공이 그 언을 정벌하자, 5월 신축일(辛丑日, 23일)에 다시 공(共)나라로 도망쳤다.
『춘추』는 왜 ‘정백, 언에서 단과 싸워 이겼다’라는 식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동생’이라고 적지 않은 것은, ‘단’이 형에게 동생답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등한 위치의 적에게 겨우 이겼음을 뜻하는 ‘극(克)’이라는 말을 쓴 것은, 동생의 힘이 강하고 한 나라에 2명의 군주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백’이라고 쓴 까닭은, 장공이 형으로서 동생을 잘 이끌지 못했음을 비난하는 뜻을 내비치기 위함이다. 동생을 불의에 빠지게 한 다음 죽이려는 것이 장공의 은밀한 뜻이었던 것이다. 경문에서 다른 나라로 도망친 공숙단에 대해 ‘도망쳤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공숙단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정백(장공)의 본심이었음을 넌지시 알리기 위해서인데, 거기에는 정백을 나무라는 뜻이 감추어져 있다.
1) BC 145~BC 86?. 이름은 천, 자는 자장(子長)이다. 『사기(史記)』의 저자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이다.
■ 백성에게 성심을 다했다면 출병하십시오
장공 10년(BC 684)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려고 출병했다. 장공이 이를 맞받아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조귀(曹劌)라는 사람이 공을 알현하려고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말렸다.
“높은 분이 꾀하는 일인데,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참견해서는 안 되네.”
그러나 조귀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높으신 분들은 눈이 어두워 멀리 내다볼 수 없는 법이라 외치며 기어코 장공을 만나 이렇게 입을 열었다.
“무엇을 믿고 싸우려 하십니까?”
장공이 대답했다.
“백성이다. 평소에 나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충분히 주어 편안히 살게 해 주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백성 모두가 공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신이다. 나는 늘 조상께 정성을 다해 희생을 바치고 제물을 올려 제사를 드렸다. 그러므로 나를 굽어살피실 것이다.”
“그것은 자그마한 성의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들은 공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행한 공정한 재판이다. 나는 소송이 제기되면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해 주었다.”
“아, 그건 백성에게 성심을 다했다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싸워 볼 만합니다. 그 싸움에 소인도 데려가 주십시오.”
장공은 그를 자신의 병차에 태우고 장작(長勺, 노나라 땅)으로 가서 제나라의 군대와 대치했다. 장공이 돌격을 알리기 위해 큰북을 치려 하자 조귀가 말렸다.
“아직 아닙니다.”
조귀는 적군이 큰북을 3번 울린 다음에야 말했다.
“지금 쳐야 합니다.”
조귀가 시키는 대로 하자 제나라 군대가 무너졌다. 장공이 제나라의 패잔병을 추격하려 하자 다시 조귀가 말렸다.
“아직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병차에서 내려 적군의 병차 바퀴를 살펴본 뒤, 병차 앞의 가로장 위에 올라서서 적군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제 추격해도 좋습니다.”
그러자 장공은 제나라의 군대를 추격하게 했다. 승리를 거둔 뒤 장공은 조귀에게 그 사연을 물었다.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는 첫 번째 북소리에 가장 크게 일어나고, 두 번째 북소리에 그 기세가 떨어지며, 세 번째 북소리에 이르러 사그라지고 맙니다. 적의 용기가 없어졌을 때 우리의 용기가 솟구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상대는 대국이니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에 복병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적의 병차 바퀴와 깃발의 움직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흔적이 마구 흐트러진 것을 보고 복병이 없다고 확신했기에 추격해도 좋다고 했던 것입니다.”
■ 하늘이 일으키려는 자는 막을 수 없다
희공(僖公) 23년(BC 637), 아버지 헌공(獻公)의 총희인 여희(驪姬)의 간계로 본국에서 쫓겨난 진(晋)나라의 공자 중이[重耳각주2) , 뒤의 문공(文公)]가 천하를 유랑하던 중에 초(楚)나라에 이르렀다.
초나라의 성왕(成王)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중이 일행을 환대해 주며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자가 만일 귀국해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생각이신가?”
“군께서는 미녀와 금은보화와 비단이라면 얼마든지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새의 깃털이나 상아, 모피도 군의 국토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 물건들이 저희 진나라에 나돈다면, 그건 군께서 쓰다 남은 것일 터이니 제가 무슨 물건으로 군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한 가지 보답은 받고 싶네.”
그러자 중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만일 군의 은혜로 진나라로 돌아가 군주의 자리에 앉는다면, 우리 두 나라가 중원(中原)에서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는 일이 생겼을 때, 저는 3사(三舍, 90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이렇게 양보했는데도 끝까지 싸우시겠다면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활을 들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영윤(令尹, 재상) 자옥(子玉)은 “앞으로 이자가 초나라의 강적이 될 것이 분명하니 암살하는 게 좋겠다”고 간했다. 그러자 성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나라의 공자는 큰 꿈을 품고 있으면서도 견실하고 덕이 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진나라 군주(중이의 이복형제)는 충신도 없을 뿐 아니라 나라 안팎이 다 그를 미워하고 있다. 중이는 진나라의 국위를 일으킬 인물임에 분명하다. 하늘이 일으키려는 자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느냐. 하늘의 뜻을 어기면 반드시 천벌을 받는 법이다.”
성왕은 그렇게 말하고 중이를 진(秦)나라로 보내 주었다.
■ 진나라의 조돈이 영공을 시해하다
선공(宣公) 2년(BC 607)의 일이다.
진나라의 영공(靈公)이 군주 노릇은 제대로 하지 않고 세금만 많이 거두어들이면서 담에도 조각을 하는가 하면, 궁전에서 아래쪽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한 뒤 사람들이 허둥대면 그것을 보고 좋아라 했다. 어느 날은 요리사가 곰 발바닥을 잘못 삶았다 하여 죽이고 여관(女官)에게 그 시체를 가마니에 담아 조정 바깥에다 버리게 했다. 그때 조돈(趙盾)각주3) 과 사계(士季)가 가마니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의 손을 보고 깜짝 놀라 여관에게 그 사연을 물어보고는 크게 걱정했다. 조돈은 사계에게 함께 군주에게 가서 간하자고 했다. 그러자 사계는 이렇게 말했다.
“둘이서 같이 간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뒤를 이어 간할 사람이 없어지고 맙니다. 내가 먼저 간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때 하십시오.”
영공은 사계가 2번이나 땅에 엎드려 말해도 본 척도 안 하다가, 빗물이 떨어지는 궁전의 처마 밑에서 3번째로 엎드려 말하자,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좀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앞으로 고치도록 하마.”
그러나 영공의 행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에 사계의 뒤를 이어 조돈이 나서서 몇 번이나 간했다. 그러자 마침내 영공은 화가 나서 자꾸 귀찮게 구는 조돈을 암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을 9월, 영공은 무장한 병사를 잠복시켜 두고, 주연에 참석하라고 조돈을 불렀다. 그러나 조돈의 병차를 지키는 차우(車右, 병차의 오른쪽에 타는 호위 무사) 시미명(提彌明)이 그 음모를 눈치채고 술자리로 달려 올라가 외쳤다.
“신하가 군주와 한자리에 앉아 3잔 이상 마시는 것은 예에 어긋납니다.”
시미명은 말을 마치자마자 조돈을 억지로 술자리에서 끌어 내렸다. 영공은 음모가 발각난 것을 깨닫고 개를 풀어 물어 죽이려 했지만, 시미명이 그 개를 때려죽였다.
“나를 죽이는 데 인간을 쓰지 않고 개를 부리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사나운 짐승인들 나를 어떻게 하리오.”
조돈은 그렇게 외치고 복병들과 싸우며 도망쳤다.
을축일(乙丑日, 27일)에 조돈의 일족인 조천(趙穿)이 도원(桃園)에서 영공을 죽였다. 망명길에 오르던 조돈은 국경의 산을 미처 넘기도 전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되돌아왔다. 그러자 태사(太史) 동호(董狐)각주4) 는 ‘조돈이 군주를 죽였다’라고 써서 조정에 공시했다.
조돈은 그렇지 않다고 항의했지만, 태사는 그 공시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 태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경(正卿, 재상격)의 신분으로 다른 나라로 망명하려다가 국경을 넘지 않고 돌아왔소이다. 따라서 아직도 정경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군주를 시해한 반역자를 처벌해야 마땅하오. 그런데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니, 군주를 죽인 책임자가 당신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란 말이오?”
조돈은 이렇게 말하며 탄식했다.
“아아, 시(경)에 ‘나의 깊은 생각이 오히려 내 슬픔의 근원이로다’라는 구절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뒷날 공자는 이 두 사람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동호는 참으로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도에 따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실천했다. 조돈은 참으로 훌륭한 대부였다. 법도를 지키기 위해 오명을 그냥 받아들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조돈이 국경을 넘었더라면 그 오명을 벗을 수 있었으련만.”
■ 힘으로 백성의 언로를 막을 수 없다
양공(襄公) 31년(BC 542)의 일이다. 정나라 사람들은 마을의 향교(鄕校)에 모여 정치를 논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연명(然明)이라는 관리가 상경(上卿) 자산(子産)에게, 이런 풍습을 없애려면 향교를 폐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자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백성들은 아침저녁으로 일을 끝내고 향교에 모여 우리의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참고로 하여 평판이 좋은 정책은 거리낌 없이 실행하고, 평판이 나쁜 정책은 고치려 애쓰고 있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나 같다. 향교는 절대로 폐지해서는 안 된다. ‘성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탄압으로는 사람들의 원망을 잠재울 수 없는 법. 물론 힘으로 누르면 그들의 입을 억지로 막을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은 강의 흐름을 억지로 막는 것과 같다. 제방이 터져 물이 한꺼번에 흐르면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지 않겠느냐. 그보다는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 수로로 이끄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백성의 언로도 이와 같아서 가로막기보다는 들을 건 들어서 나의 약으로 삼는 게 옳다.”
연명은 그 말에 감동해 이렇게 답했다.
“이제야 소인은 누구를 믿고 섬겨야 할지 알았습니다. 눈이 탁 틔는 것 같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행한다면, 모든 정나라 사람들은 님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뒷날 공자는 자산의 말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상, 어느 누가 자산을 어질지 못한 사람이라 욕하더라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 책 속의 명문장
問鼎之大小輕重焉 / 문정지대소경중언
솥의 무게를 묻는다는 말로, 어떤 직위에 있는 인물의 자격을 묻고, 퇴임을 압박한다는 뜻이다.
주나라 왕실에는 왕위의 상징으로서 솥이 대대로 전해졌다.
주 왕실의 권위가 약해졌을 때 초나라 장왕(莊王)이 그 솥의 크기와 무게를 물은 일에서 유래한 말이다.
食指動 / 식지동
정(鄭)나라의 공자 자송(子宋)은 특이한 버릇이 있었으니, 식지(둘째 손가락)가 움직이면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일이 생겼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식지가 움직인다’라는 표현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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