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군주」 정조의 좌절
이즈음부터 정조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정조의 입에서는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거나
“나 혼자서 천 칸의 창고를 지키는 격”이라는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이를테면, ‘임금짓 못해먹겠다’는 푸념을 연발한 시기였던 셈이다.
또 갈수록 독단적으로 변해가는 정조에 대한 노론벽파의 저항 또한 거세어져갔다.
정조의 면전에서 그들은 “명령이란 명령은 모조리 따르라는 하교는 아마도 십분 지당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요 임금이나 순 임금 시대에도 명령을 거부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라고 반박한다던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는 못하겠습니다”하는 반발을
공공연히 하는 실정이었다. 임금과 신하들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무리를 ‘우리당의 선비(吾黨之士)’로,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역적의 편’이라 하는 극단적 편 가르기로 회유와 협박을
더욱 노골화하였던 것도 기실 이때부터였다. 게다가 이 해부터 더욱 강화된 금령(禁令),
즉 ‘언로의 통제’는 정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정조는 인사문제나 역적토벌과 관련하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해당사항에 대해
금령을 설치하여 신하들의 상소나 치자에서 언급하지 못하게 하곤 하였다.
정조가 신하들을 가르칠 상대로만 보고 비판과 조언을 받을 상대로 보지 않은 결과는
정치의 무력화와 통치의 무사안일화로 나타났다.
1798년(정조 22년) 여름에 헌납 임장원은 “이로써 오늘날 전하의 정치가 지금 당장
무기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 동안의 일을 경계하셔야 되리라 느끼고 있고,
전하께서 오늘날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무사안일에 빠졌다고는 할 수 없을 지라도
앞으로의 일을 더욱 두려워해야”한다고 정조의 통치방식에 직격탄을 날리기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799년(정조 23년) 1월에는 ‘좌우의 팔’이라 할 수 있는 채제공과 김종수가
약속이나 한 듯이 열흘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 그 전후로
군국(軍國)의 기무에 밝았던 ‘윤시동도 가고’, 나라의 재정을 도맡아왔던 ‘정민시도 갔다’.
깊어가는 고립감에 괴로워하던 정조는, 재위 24년 5월초 우의정인 소론의 이시수가
현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생 이만수(서명선의 사위)를 이조판서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리고는 사도세자의 기일(5월 21일)을 맞아 열흘간
근신재계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 기간 중 정조의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글들이
나왔고, 당사자인 이만수까지도 이 인사조치의 철회를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특히 김이재는 이 같은 정조의 인사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일을
전후로 한 근신재계를 마치고 나온 정조는 소론의 윤광안을 이조참의에 임명함으로써
이조의 주요 직책을 소론 일색으로 구성해버리는 초강수를 두어버렸다. 일찍이 정조
스스로가 천명하였던 ‘대승기탕 탕평책’의 원칙 자체를 무시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기실, 그즈음 정조는 4년 후의 갑자년을 염두에 두고 당색을 뛰어넘어 ‘소장파’들을
전면에 재배치하는 새로운 인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원로대신들이 거의 떠나간
상황이었으므로 자신이 즉위이후 초계문신제도 등을 통해 키워낸 새로운 신하들을
자신의 임의대로 포진시켜 세대교체를 이루고 자신의 정치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조를 소론 일색으로 구성해버린 것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고 정조와 신료들 간의 극단적 입장차이만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러자 정조는 그해 5월 29일 인사조치에 저항하였던 김이재를 언양으로 귀양 보내는 강수로
이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하였다. 하지만 정작 정조가 앞날을 내다보며 특별히 신임을 부여한
우의정 이시수와 이조판서 이만수 조차도 정조의 조치에 반대하면서 김이재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정조는, 이러한 정치적 파란과 노론벽파 신료들의
태도에 대해 보다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또 하나의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로 하였던 것이다.
재위 24년(1780년) 5월 30일, 정조는 이날 경연에서 신하들에게 중요한 하교를 내렸다.
5월의 그믐날이었기 때문에 ‘오회연교(五晦筵敎)’라 일컬어지는 이 하교에서 정조는
‘참다 참다 내리는 하교’임을 전제한 다음 먼저 자신의 재상임명 기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정조는 채제공, 김종수, 윤시동을 거론하며, 이들을 등용하고 내보낸 주기가 모두 8 년
이었음을 밝혔다. 8년의 시련기를 주어 당사자들로 하여금 신망을 기르게 했다는 것이었다.
(기실 이 하교는 남인세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남인들은 이를 장차 남인으로 환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또한 등용하고 물리치는 기준이 없었던 선왕들과 달리 자신은 이런 기준을 두고 재상을
등용하였으므로 김이재의 반발은 이러한 자신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한 ‘속된 습속’이라고
몰아붙이는 한편 김이재의 배후에 반드시 조종한 자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배후에서
조종한 자는 사흘 안에 ‘자수’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까지 ‘의리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론)‘으로서 바로잡을 것임을 언명하였다. 노론벽파에게는
그야말로 ‘협박’이나 다름없는 하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료들이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정조는 결국 이만수와 유광안의 이조판서직과 이조참의직 임명을 철회하고 말았다.
하지만 6월 3일이 지나도 자수하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조의 노여움은 비등점을
향하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 정조는 벽파의 영수 심환지 등을 불러 최후통첩을 한 뒤
6월 16일, 등에 난 종기 때문에 크게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다시 심환지, 이시수 등을 불러
마지막으로 경고하였다.
“아무개가 음침한 장소에서 악인들과 이런 저런 교제를 갖는 작태에 대하여 나도 익히
들은 것이 있다. 내가 입을 열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 기울이고 있어도 자수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이른바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도 한 군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비밀히 내통하는데 이것이 사대부들이 할 짓인가? 내가 그들을 사대부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방치하고 있으나, 내가 한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결판이 날 판인데
그들은 오히려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
심환지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같은 노론의 이시수가 나서
'과격한 어조는 몸에 해롭다'고 만류하였으나 정조의 어조는 한층 격해지고 있었다.
“경들이 하는 일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 같은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
달라고 청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나를 나약하다
생각하고 감히 이렇게 하고 있으나 조만간에 결말이 날 것이다. 비유하자면 종기에 고름이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반드시 그것이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지만,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나서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빨리 시파로 전향해오라’는 협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환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매한 서민이라도 그 누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또 누가 감히 그 사이에 이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교묘한 답변으로 정조의 추궁을 노회하게 빠져나갔다.
이로써 정조와 신하들의 결별은 시작되었고,
양측의 대립은 그 끝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정조의 집요한 왕권강화의지도,
세상을 바꿔버리고자 한 개혁에의 꿈도 모두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오회연교 열흘쯤 뒤부터 등에 난 종기 때문에 고통을 겪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즉위 24년 6월 28일.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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