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군주」 정조의 좌절
이듬해인 1795년(을묘년) 윤2월 9일 아침 정조는 저 유명한 ‘을묘원행(乙卯園幸)’을
단행하였다.{임금의 행차를 행행(行幸)이라 하는데, 능(陵-왕과 왕비의 무덤)이 아니라
원(園-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이었으므로 이를 원행(園幸)이라고 불렀다.}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이장한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의 묘소(현륭원)를 참배해왔던 정조였지만, 1795년의 현륭원 참배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원행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갑을 기념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8일간의 원행을 통해 정조는
개혁의 상징공간인 화성에서 자신의 회복된 정당성을 선언하고, 괄목할 만큼 성장한
장용영의 위세를 반대파(노론벽파)에게 확인시켜 줌으로써
왕권을 더욱 확고히 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행차 열흘쯤 전 유언호와 채제공을 불러 앉힌 자리에서 노론인 유언호에게
‘마음 단단히 먹을 것’과 ‘백성이 원하는 정치를 위해 거침없이 진입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이 정조가 그즈음 수차에 걸쳐 언급해 왔던,
그의 ‘숨은 뜻’이었던 셈이다.
그 아침, 문무관료와 군인 등 6천여 명이 동원된 거대한 참배 행렬은 돈화문을 출발하여
종루(보신각)와 숭례문을 지나고 노들(노량)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넌 다음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들었다. 연도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늘어서 이 행차를 ‘관광’하였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황금갑옷으로 갈아입은 정조는 타고 온 뚜껑 없는 가마 대신
말로 갈아타고 장승백이 고개를 넘었다.
이를테면 ‘숨은 뜻’을 보여주기 위한 행장을 본격적으로 갖추었다고나 할까.
원행 첫날을 시흥행궁에서 묵은 정조 일행은, 둘째 날 오후 화성에 도착하였다.
황금갑옷에 말을 탄 모습 그대로였다. 셋째 날은 낙담헌에서 문무 향시(鄕試)를 치러
문과 5명, 무과 56명을 선발하였고 저녁에는 모레 벌어질 회갑연의 예행연습을
봉수당 마당에서 열었다. 그리고 ‘문제’의 4일째 되던 날, 정조는 어머니와 현륭원을
참배한 후 저녁부터 새벽까지 대대적인 야간 군사훈련(야조식)을 실시하였다.
정조는 병조판서 심환지 등 노론대신들에게 이를 지켜보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조는 화성에서 제일 높은 곳인 서장대에 올라가 군대를 진두지휘했다.
전시도 아닌 시기에 임금이 황금갑옷을 입고 친히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이다.
조선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훈련을 지켜본 대신들은 불안감에 떨었다.
그리고 임금 정조의 지나친 위용을 두려워하였다.
정조의 감독아래 훈련에 동원된 병사들은 장용영 병사들이었다.
장용영(壯勇營). 주지하다시피, 정조의 호위군대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나 단순히 호위군대라 하면 무언가 2%정도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 장용영은 이를테면 정조의, 정조에 의한, 정조를 위한, 정조만의
‘사병(私兵)’조직이었던 셈이다.
당시 군권은 노론을 위시한 양반 세도가문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기존의 오군영은 노론 권력층과 결탁한지 오래였다.
군대가 임금의 손을 떠나 사병화하고 있음을 우려한 정조는
‘자신만의 군사조직’을 갖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장용영이었다.
장용영은, 정조 즉위 8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린 것을 기념해 실시한
무과시험에서 뽑은 30명의 정예무사들을 기반으로 탄생하였다. 정조는 해마다
병사 수를 늘리고 장용내영과 외영을 설치하는 등 장용영의 외양을 확대해 나갔다.
정조는 또 병사들을 직접 훈련시키기도 하였는데 특히 18기라는 무예를 집중적으로
익히게 하였다. 정조는 18기의 보급을 위해 이를 집대성한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도
편찬했다. 사도세자가 완성한 18기에 마상무술 6기를 더해 편찬한 책이 무예서보통지이다.
정조는 마치 사령관과 같은 모습으로 병사들을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하여, 장용영은 서서히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로 성장하였다. 하루 3000발 이상의 활을
쏘게 하는 등 장용영 병사들의 훈련량은 오늘날 ‘특수부대’의 그것을 능가할 만치 강도가
높았다. 정조는 장용영 병사들을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켰고, 병사 하나하나의 훈련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장용영 병사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장용영 병사가 된다는 것은 곧 임금에게 인정받은 무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30명의 무사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이후 정조의 치세 하에서 1만 8천명까지 늘어나며
그 위용을 떨쳤다.
한편, 8일간의 원행이 무사히 마무리 될 즈음 정조는 화성의 세심대에서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신하들의 입에서는
“오늘의 성대한 행사는 천년을 가도 보기 드문 일”이라는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정조는 한껏 고무되었다. 8일간의 원행을 통해 ‘얄미운’ 노론대신들을
납작코로 만들어놓았겠다, 이제 그의 앞에는 어떠한 암초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른바 ‘갑자년 구상’이라는 걸 밝히기도 하였다.
즉 사도세자의 결혼 60주년(回婚)이 되는 10년 뒤 갑자년에 다시 화성에 와서 연회를
베풀기 위해 수라용 그릇들을 화성행성에 그냥 놔두고 갈 것을 지시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이 해(1795년)를 전후로 한 1년 남짓은 오히려 정조에게 있어
재위기간 중 가장 힘든 나날이 되고 있었다. 여전히 ‘대통합의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 또한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었다.
화성행차를 앞두고는 측근의 비리를 폭로하는 노론 권유의 상소가 올라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는 ‘전하가 즉위한 지 15,16년이 지나면서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고
민지(民志)가 날로 미혹되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르고
말았다’고 지적하면서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伏誅)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정치적 비리를 폭로한다고 하였다.
즉, 정조의 측근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화성축조 과정에서 공사비를 빼돌리고
있으며, 장용영과 같은 신설 군영이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령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여 비리에 연루된 측근 정동준으로 하여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임금의 위세와 권력을 훔쳐 농단한 죄’로 자결하게 하였다.
게다가 연금상태에 있던 고모 화완옹주를 석방하고, 강화도에 유배가 있던 이복동생
은언군을 몰래 불러 창덕궁 북쪽의 훈련도감에 머물게 함으로써
노론세력을 위시한 신료집단과 큰 갈등을 빚었다.
사실 이는 정조의 중대한 실수였다.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고 내외척을 멀리 한다’는
자신의 정치 원칙을 스스로 저버린 행위였던 것이다. 한번 원칙이 무너지자 왕의 발언도
힘을 잃었다. 국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인척을 풀어줬다는 비판이 쇄도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거부에 돌입하는가 하면 시임․원임 대신들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 후 곧장 시골로 향하기로 결의하였다.
정조는 금령(禁令-언로를 통제하는 기구)을 설치하여 그 사안을 아예 거론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였지만, 남인시파까지 가세한 집단적인 반발에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또한, 전 해에 밀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관련하여 남인에 대한 노론의 공세가
거세지자, 여론에 떠밀려 남인의 개혁공신 이가환과 정약용을 각 충주목사와 금정찰방으로
좌천하고 말았다.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좌천되자 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공백을 자기들 인사로 채워버렸다.
그동안 어렵사리 조성한 ‘탕평정국’이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이가환과 정약용이 떠난 지 얼마 뒤 ‘전하로부터 신임을 독점했다’는
평을 듣던 정조의 오른팔 채제공마저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금년이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가버렸다.
전 해 겨울에는 1년 전 정권의 명운을 걸고 시작하였던 화성건설의 중단을 촉구하는
노론벽파의 상소도 쏟아져 들어왔었다. 그 해 여름에 태풍이 불고 그 여파로
경기․충청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화성축성에 대한 반대여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체제공을 비롯하여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은
토목공사를 계속하여 구휼의 효과를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정조는 뜻밖에도 화성공사 중단을 선언하였다.
겨울철에 공사를 강행하는 것이 무리일 뿐만 하니라,
전국적인 규휼책과 대규모 공사의 병행은 재정적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민심을 잃으면 설 곳이 없다는
정조의 지론에 기인한 결단이었다.
(화성 축성은 원래 10년 기한이었으나
단축되어 3년만인 정조 20년(1796년) 10월 낙성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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