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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정국「환상의 복식조」- 정조와 채제공 (1)
    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2019. 5. 27. 20:47


      
      ■ 개혁정국「환상의 복식조」
      
      그렇다면, 김종수를 필두로 한 노론벽파는 정조의 탕평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초지일관 정조의 탕평책을 비판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탕평책이 정치원리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관직을 
      당파별로 배분함으로써 무능한 자들이 대거 자리를 꿰차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왔다. 
      정조가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사정책을 국정에 접목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철옹성 같은 노론벽파의 반대에 부딪혀 기대했던 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론세력은 정조의 ‘정치행위’ 자체까지도 집요하게 부정하였다. 
      ‘전하가 정치하는 것은 근본을 버려두고 말단만 다스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국가를 조종하는 방술이 부족하다’고 비판(즉위년 11월 정언 한후익)하기도 하고, 심지어 
      ‘임금 자신의 뜻만 내세우고 신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즉위 4년 3월 서장수)거나 
      ‘국왕이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 신하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 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다’(즉위 13년 11월 김종수)는 비난까지 
      서슴없이 쏟아내는 실정이었다. 
      남인과 노론,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고 때에 따라서는 노론에게 3정승 자리를 모두 맡기는 등 
      정국안정을 위하여 ‘웬수같은’ 노론세력의 비위를 맞추는 국정운영까지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노론세력에 의해 ‘소수파의 임금’정도로 폄하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결국 이 같은 ‘수구꼴통’세력를 제압하지 못하는 한 정치발전은 요원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간 좌고우면 않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쳐온 결과 정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는 괄목할 만 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즉위 2년째 되던 해에 군제개혁에 착수하였고, 재위 9년에는 서얼을 요직에 임용하는 
      사회개혁을 시도하였다. 재위 10년과 13년에는 언론개혁과 관료제 기강확립 차원에서 
      이조전랑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3류’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가 
      더 큰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대다수 신료들은 '개혁'이라는 명칭 자체의 사용을 꺼렸고 
      '개혁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쓰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정조의 시름이 점차 깊어갈 즈음, 그의 뇌리를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한 인물이 있었다. 채제공―. 그랬다. ‘영조가 보증한 충신’ 채제공이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1788년(즉위 12년) 홍국영과 친교가 있었다는 죄목으로 조정에서 밀려난 후 
      서울근교 명덕산 일대에서 8년간 은거하고 있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우의정에 제수하였다. 채제공은 일찍이 도승지의 신분일 때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폐위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여 이를 철회시킨 바 있었고,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금등-쇠줄로 봉해 비밀문서를 넣어두는 상자)의 서(書)’를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선택될 만큼 영조의 신임이 각별한 인물이었다. 
      채제공은 이때 황극(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이 될 만한 법도)을 세울 것 등 6가지 
      요구사항을 정조에게 진언(6대 진언)하였고 정조는 이를 모두 받아들이는 한편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북학파를 대거 등용하게 되었다. 남인의 정약용,이가환 
      북학파의 박제가 서얼출신의 유득공․이덕무 등이 모두 이때 활약하게 되었다. 
      채제공의 우의정 등용은, 특히 남인의 근거지였던 영남 사대부들을 고무시켰다. 
      무려 80년 만에 남인이 정승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미상불 사대부들만 놓고 보았을 때 
      조선 후기에 차별을 받은 지역은 단연 영남이었다.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은, 영조 4년(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영남지역 전체가 
      ‘반역향(叛逆鄕)’으로 낙인찍히면서 출사길 자체가 봉쇄당했었다. 
      그들은 비(非)노론 국왕이 등장해야만 자신들이 조정에 진출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실망했던 남인들은 그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다시 환호성을 터뜨렸다. 더욱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정조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우의정에 전격 임명하였던 것이다. 
      남인은 드디어 자신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즈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행 정치체재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한 정조는 사도세자 묘의 천장(遷葬=이장)과, 이와 연계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정조에게 있어 서울은 이미 80년 이상을 집권한 
      ‘노론의 수도’였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다 할 경우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역시 노론의 반발이었다. 
      그들은 사도세자 문제만 거론되면 본능적으로 알레르기 반응 같은 걸 나타내곤 하였으니까. 
      정조의 이 같은 고민을 해결해준 인물은 그의 고모부 박명원(연암 박지원의 8촌형)이었다.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이었지만 일절 정사에 개입하는 법이 없어 
      왕실 외척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평을 듣던 박명원이 처남인 사도세자 묘의 천장을 
      요구하고 나서주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매형되는 사람이 천장을 요구하니 
      제아무리 노론이라도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정조는 즉위 13년(1789년) 10월 7일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오래 전부터 점찍어 두었던 수원 용복면 ‘화산(華山)’으로 옮기고, 이곳을 현륭원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이후 매년 현륭원을 찾았다. 이는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정조의 원행 때 어가를 따르는 인원이 6천명을 넘었고 동원된 말만도 
      1천 4백 여필이나 되었으니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던 백성들에게 
      이는 기실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백성들은 정조의 원행 때면 구름같이 몰려나와 행차를 구경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 백성들과 직접 만나는 것을 
      선호하였다. 할아버지 영조가 폐지하였던 신문고를 부활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신문고는 백성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궁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진솔한 
      의견수렴엔 한계를 노출하였다. 이에 정조는 현륭원을 찾는 길에 달려드는 수많은 백성들의 
      절실한 호소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였다. 
      하여 어가가 쉬어가는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올리는 
      상언(上言)이나, 어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징을 쳐 소원(訴願)의 기회를 만드는 
      '격쟁'에 대해 약간의 벌을 주되 이를 접수하여 그들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었다. 
      상언이 소장(訴狀)을 갖추어야 하는데 비해 격쟁은 구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낮은 신분에서 이를 행한 경우가 많았다. 정조 19년 원행 때는 창원의 한 여인이 부사 
      이여절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정준)의 사정을 호소하자 
      정조가 이여절을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그의 ‘오른팔’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지 2년 뒤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때는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이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모친상으로 
      정국에서 물러나고 영의정 김일 또한 출사를 거부하여 조정에 정승이라고는 채제공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이후로도 3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 3년간을 일컬어 
      ‘채제공의 독상시대(獨相時代-나홀로 정승시대)’라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 ‘독상시대’는 정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노론의 세가 가장 허약해진 시점을 택해 ‘노론제압’과 ‘개혁추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J-C(정조-채제공)라인」은 
      개혁군주 정조가 생각해낸 최상의 조합이기도 하였다. 숙종 대에 짧은 권력의 단맛을 본 이후 
      만년야당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채제공의 남인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았으므로 
      당연히 개혁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를 개혁의 적기라고 판단한 정조의 뜻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제 조정에서 정조와 마주앉아 국정을 논하는 자는 
      채제공 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두 ‘개혁 콤비’는 정조 15년(1791년) 조선 상업사 최대의 사건을 합작하여 
      만들어냈다.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그것이었다. 신해통공이란, 사상(私商)들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해준 조치를 말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의 육의전
      (六矣廛-조선시대에 종로에 있던 여섯 종류의 어용(御用)상점, 오늘의 ‘조달청’격)을 
      비롯한 시전상인(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대신 도성 내에서 독점적으로 장사할 수 
      있는 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상업활동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금난전권(禁難廛權-‘난전’을 못하게 하는 권리)을 얻어내 
      사상(私商)들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의 상업활동 독점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들의 특권을 모두 폐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신해통공은 그 이전부터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왔던 노론에 대한 응징의 측면이 
      강한 조치였다. 그들은 금난전권을 보유한 시전상인들과 결탁하여 각종 이권(수입세, 
      자릿세 등)을 챙기는 등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정조와 채제공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노론세력에 흘러들어가는, 어떻게 보면 노론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줄(돈줄)’ 자체를 끊어버리려는 엄청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남인인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천주교식 장례로 치룬 이른바 ‘진산사건’이 터져 
      남인은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 신봉을 묵인)와 공서파
      (攻西派-가톨릭교 탄압)로 나뉘어졌고, 
      채제공은 공서파의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1792년 복직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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