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갈량은 유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웠던 후한 말에는 제위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아
재능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군주를 택해 섬겼다.
그러나 당시 재능있는 인사 중에서도 발군으로 여겨지던 제갈량이,
영웅의 기상을 가지고 크게 천하를 경략하던 조조나,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을 등용하기로 소문난 손권과 손잡지 않고
왜 기반도 정치력도 없는 유비를 택했을까?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의 예를 다한 후 천하의 대세에 대해
가르침을 청한다. 그리하여 '천하삼분지계'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고는 출사를 재촉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애초에 출사할 의사가 없었다.
"저는 오랜 세월 밭일을 즐겨 세상일에 게을러졌습니다.
아무래도 명을 받들기 어렵겠습니다."
유비는 실망의 빛을 나타내며 말한다.
"선생께서 나오시지 않으면 고통받는 저 백성들을 어찌하란 말입니까?"
유비는 이렇게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고, 제갈량은 유비의 뜻이 매우 진실됨을 알고는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며 응한다. 제갈량은 집을 나서며 동생인 제갈균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삼고의 은혜에 감동하여 나아가지 않을 수 없구나."
또 제갈량은 나중에 유선에게 바친 전출사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제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일부러 세 번이나 모옥을 방문하셔서 천하의 형세를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에 감격하여 선제를 섬길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을까?
[삼국지연의]와 출사표에 나오는 '삼고의 은혜'설은 사실이라는 것이 대개의 견해이다.
제갈량은 은거하면서 농사만을 지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었으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삼분의 융중대책은 제갈량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야심가라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그가 융중에 숨어 지냈던 것은 위업을 실현 할 수 있는
사람의 출현과 자신이 나설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시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략가였다. 그러나 조조의 곁에는
이미 인재가 모여 있었다. 순욱, 곽가, 순유, 최염 등은 모두 문무의 계략을 갖춘 일류 인재들이었다.
만일 제갈량이 조조에게 투신한다면 그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하고, 일거수일투족이
결정적인 힘을 갖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조조는 잔인한 성격으로 의심이 많음은 물론 늘 권모술수를 부렸다.
그리고 제갈량의 정치적 이상이 조조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조조와 행동을 같이하기는 어려웠다.
손권도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천하통일의 웅대한 뜻이 결여되어 있었다.
부친과 형님이 쌓은 기반을 지키기에 급급해 강도의 한쪽 구석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것도 제갈량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더구나 손권의 주변에는 노숙, 장소 등이 있었기 때문에
관중,악의의 재능을 부릴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의 이상에 부합되는 사람이었다.
당시 유비는 몇 번이나 좌절을 반복해 자신의 몸 하나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천하를 제패할 재능과 책략이 있었다.
또한, 천하의 영웅이라는 칭호도 얻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유비의 뜻은 위로는 국가에 보은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에 있었다. 그러므로 천하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점이 제갈량의 정치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비는 재능있는 인물을 만나면 허리를 굽혀 맞이했으므로
인심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신변에는 재능있는 신하가 부족해
제갈량이 그에게 투신하면 중용될 것이 확실했다.
당시 형주의 선비 일부는 유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더불어 유비 자신도 제갈량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결국 출사한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택한 이유는 심사숙고 끝에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처럼 유비의 삼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동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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