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한 시기가 다르다.
서서는 영천(현재의 하남성 우현) 사람으로 자는 원직이며, 초명은 서복이었다.
원래 제갈 량과 친구 사이였고 나중에 유비에게 귀의했는데,
[삼국지연의] 제36회부터 유비를 보좌하는 역으로 나온다.
그는 조조의 부하장수인 여강, 여상, 조인을 격파하고 번성을 공격해 빼앗는다.
조조는 서서의 뛰어남을 알고, 정욱의 계략을 이용해 서서의 모친을 허창으로 잡아와
그녀의 필적을 흉내낸 편지를 보내 서서로 하여금 모친을 구하려면 항복하라고 했다.
효자였던 서서는 편지를 받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유비의 곁을 하직하는데,
유비는 송별연을 열어 그를 보내면서 못내 이별이 아쉬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를 따라간다.
결국 서서가 간 후에 유비는 말을 멈추고 비 같은 눈물을 흘렸는데, 서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도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서서는 가다가 문득 중요한 것을 생각해내고는 말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그리고 유비에게 관중이나 악의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며 제갈량을 추천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천지를 헤아리는 재능을 가졌으므로 천하에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서둘러 들리시어 대면하십시오."
또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는 사마휘가 말했던
'와룡과 봉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얻는다면 천하를 편안히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생각해 내고는 즉시 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에게 세상에 나올 것을 요청하러 간다.
그 후에 서서는 허창에 가지만, 모친은 '거짓 편지에 눈이 멀어 전후 생각도 하지 않고
현명한 군주를 버렸다'며 꾸짖고는 자살해 버린다. 이 일로 인해 서서는
몸은 조조의 진영에 있으면서 마음은 유비에게 있어, 종신토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의 계략도 바치지 않았다.
이상이 수백 년 동안 세간에 널리 전해져 온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서서는 지극한 효심과 제갈량을 추천했다는 두 가지 점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200년에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를 물리쳐 북방을 통일하고, 이어서 대군을 이끌고 남방에
있던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조조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유표에게 의지해 신야에 주둔한다.
서서가 유비에게 투신한 것이 바로 그때로 재능이 뛰어나 유비에게 중용되었다.
그리고 유비의 한실의 부흥과 패업 달성을 돕기 위해 207년 즈음에 유비에게 친한 친구인
와룡 제갈량을 추천한 것이다.
이처럼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문제는 서서가 언제 제갈량을 추천했는가이다.
나관중이 말하듯이 유비와 서서가 이별했을 때일까?
앞에 밝힌 대로 제갈량을 추천한 것은 207년 일이다. 당시 서서는 유비의 유능한 모사였다.
그럼 서서는 언제 유비의 곁을 떠났을까? 역사의 기록을 보면 208년이 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해에 유표가 병사하자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했고, 유표의 아들인 유종은
강대한 군사력 앞에 굴복해 조조에게 투항했다. 번성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남방으로 철수했는데, 그때 서서와 제갈량은 군중에서 함께 유비를 보좌하고 있었다.
조조의 대군은 장판까지 추격하며 유비 군을 완전히 깨뜨렸다.
그리고 조조는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잡고 서서에게 귀순하도록 협박했는데,
서서는 모친이 조조의 진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서서의 공로라고 했지만,
실은 많은 사람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나관중의 이야기는
이밖에도 자세한 줄거리에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첫째, 정사의 [촉서] <제갈량>과 배송지의 주에서는,
서서의 모친이 조조에게 붙잡히자 서서는 바로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조조가 거짓 편지를 쓴 사실은 없었다고 되어 있다.
둘째, 서서는 조조에게 귀순한 이래로 조비의 황초 연간까지 계속
관직에 있었으며 우중량장과 어사중승을 역임했다.
평생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가지 계략도 진언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러한 높은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나관중이 시기를 나중으로 돌리고 역사적 사실을 고친 이유는
서서와 제갈량의 재능의 고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며,
또 한 조조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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