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융중대책은 제갈량 혼자만의 지혜가 아니었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있고, 나서, 제갈량은 천하의 대세를 분석하여 유명한 융중대책을 내세웠다.
당시 천하의 대세에 의거해 정치, 경제, 군사, 지리, 인사 각 측면을 구체적으로 분석 해
반복과 비교를 거듭하면서 일련의 정합성이 있는 전략과 책략을 내세운 것이다.
우선 단기목표로는 첫째가 형주의 유표를 쓰러뜨리는 것이었으나 유비는 그 일을 바로
실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유표가 죽고 적벽대전의 전투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형주의 일부가 유비의 손에 떨어졌다.
둘째는 익주의 유방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익주는 남서에 편재되어 있었지만, 이곳이야말로
유비가 뿌리를 내릴 장소이며, 기회를 보아 빼앗아야 한다고 제갈량은 보았다.
셋째는 손권의 역량을 인정하고 그와 동맹하는 것으로, 손, 유 동맹은 쌍방이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장기목표는 촉을 지배하는 것, 중원을 북벌하는 것, 한실을 부흥시키는 것 등이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융중대책은 확실히 길을 열기 위한 진취적인 방법이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벌어지는 일이 많고 정세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융중대책이 예상만큼의 효과를 올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만큼의 효과는 아니라도 그 효과가 매우 현저했다는 것은 융중대책이 길이 전해질
가치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래서 주자학으로 알려진 사상가 주희는 제자에게,
"역대에 몇 마디 말로써 천하는 도모할 계략을 정한 것으로는 우선 제갈량의 융중대책을 천거한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향해 융중대책을 피력했다는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융중대책의 내용은 제갈량 혼자의 지혜인가?
융중대책은 제갈량의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학자들은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고
깊이 연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갈량이 살고 있던 형주의 선비 그룹과 당시 사람들이 남긴
천하의 형세에 대한 논의와 구상 등을 분석해, 융중대책은 결코 제갈량 혼자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한말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말발굽으로 중원을 유린하고 서로 다툰 결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낙양과 장안은 온통 폐허로 변했다.
한편 형주는 기본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중원 사람들은 전란을 피해
속속 형주로 몰렸는데, "선비의 고장 형주로 피난한 사람은 무도 천하의 준걸이었다."라고
역사서는 전하고 있다. 물론 형주 자체도 인재 배출의 땅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방덕공,사마덕조,
황승언, 서서, 방통, 제갈량 등 쟁쟁한 인물들이 형주에 운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표와 함께 대업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직에 오르라는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 그렇다고 마냥 세간으로부터 초연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때를 기다렸다가 봉황의 나래를 펴기 위해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며, 명군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자주 회합을 가지며 고전이나 역사서를 연구하여 천하의 대세를 논하고,
당시 군벌 지배의 암흑시기를 공박했다.
이렇게 해서 형주, 양양 일대에서 명사와 청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그룹이 형성되어
중소 지주층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갈량은 그런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석광원, 서서, 맹공위 등과 함께 방덕공, 사마덕조 등의 명사와 친하게 지내며 가르침을 받았다.
게다가 황승언의 사위이기도 했다.
제갈량은 그들과 끊임없이 왕래하며 토론을 주고받음은 물론, 학문을 닦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는 스승이나 친구를 통해 적지 않은 정치적 소양을 길렀고,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제갈량은 학식이 비범하고 지혜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며,
형주, 양양 선비 그룹의 관심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유비가 형주에서 제왕의 혈통과 천하의 영웅이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현명한 사람을 찾고
있을 때, 유비에게 호감을 가진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은 그 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와룡 제갈량과, 봉추 방통을 추천한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서 융중대책을 강구했고, 방통은 방통대로 '지금 천하는 동으로는
오의 손씨, 북으로는 조씨가 있으므로 익주를 손에 넣어야 비로소 셋이서 대립하는 형세를
만들 수 있다고'고 진언했다.
이같은 방통의 견해가 그만의 생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의 융중대책도 제갈량
혼자만의 것은 아니며, 그것은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에 의한 집단적 지혜의 결정체였다.
더욱이 후한말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란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제갈량 외의 다른 식견있는 선비들도 모두 각자의 경험과 그 시야가 미치는 만큼 시국의 동향을
관찰하고 장래의 움직임을 헤아려 자신이 갈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에서는 노숙이 제갈량의 융중대책 이전에 손권을 향해 '한실의 부흥은 불가능하다는 것',
'조조를 제거하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강동에 자리를 잡고 천하를 도모할 기회를
엿보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유표를 정벌하고 장강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제위에 올라 천하를 도모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있다.
정사와 배송지의 주에 의하면, 후한 말 오의 감령, 주유, 형주의 방통, 익주 유장의
재능있는 신하 법정 등은 모두 '천하삼분'이라든가, '그 하나의 다리를 공격한다'
라든가 하는 논의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구상이 비슷한 것은
제갈량의 융중대책이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 투쟁의 산물이며,
한 사람의 천재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방통과 제갈량은 모두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에 속하는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노숙은 오 나라 사람이지만 형주, 양양의 선비들과 밀접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융중 대책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방통, 노숙의 견해가 제갈량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제갈량의 융중대책을 그 혼자만의 지혜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를 구상해 망설임을 없애 준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제갈량이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당시의 정세를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으므로, 천하는 반드시 삼분 된다고 예측한
그의 판단을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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