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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과거제도- (3)
    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2019. 4. 7. 23:10



    
    ■ 응시자 중 답안지 제출자는 30% 
    
    박제가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그때보다 백 배가 넘은 유생(儒生)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武人)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심한 경우에는 마치(무엇을 두드리거나 못 따위를 박는 데 쓰는 작은 연장)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문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을 얻어먹기도 하며, 변소에서 구걸을 요구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고 나면 머리털이 허옇게 세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하는 일이나 
    압사(壓死)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온화하게 예를 표하며 겸손하여야 할 장소에서 
    강도질이나 전쟁터에서 할 짓거리를 행하고 있으므로 옛사람이라면 반드시 
    오늘날의 과장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안대회 역, 과거론, 북학의 155면).” 
    시험장에 거자뿐만 아니라 힘센 무인(아마도 선접군인 듯)과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온다니 기강이 말이 아니다. 거기에다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왔다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던 셈이다. 좁은 공간에 사람이 몰리면 싸움이 벌어진다. 
    난투극이 벌어지고 마침내 사람이 압사하는 일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북학의’는 정조 때 쓴 것이다. ‘한양가’에서 풍속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 
    19세기만의 일이 아니라, 이미 18세기에도 일반화된 일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 때라면 역사에서 조선의 르네상스 운운하는 시기다. 
    이 르네상스에 이런 난장판이라니, 납득하기 어렵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양가’에서 언급한 ‘자리잡기에 밀려난 장원봉 기슭과 궁장 밑 생강밭에 
    잠복 치고 앉은 약한 선비들’은 도대체 무엇하러 과거에 참여했던 것일까. 
    정조 24년의 시험에는 10만명 정도가 응시하여 3만명 정도가 답안지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조 때 화가인 장한종(張漢宗)의 ‘어수신화(禦睡新話)’란 책에 
    짧지만 과거의 모순을 고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시골 선비가 식년(式年)에 과거길을 걱정하고 있었다. 종놈이 묻기를, 
    ‘서방님, 무얼 그리 근심하셔유?’ 그러자 선비는 ‘간구한 양반이 또 과기(科期)를 당하니 
    어찌 근심이 안 되겠느냐?’라고 답했다. 그러자 종놈은 ‘매번 과거만 닥치면 
    서방님 행차합시느라 노마(奴馬)에 부비가 불소한 데 어려운 가세에 마련이 
    극난하구 말굽쇼. 금년 과장에는 쇤네가 대신 가기로 합지유. 
    명지(名紙)와 노비만 들 터이고 기타 부비야 크게 절감될 것이 아닙니까유?’라고 말했다. 
    선비는 ‘예끼 이놈, 네라서 양반이 하는 일을 한단 말이냐’하고 소리를 질렀다. 
    종놈은 ‘시지(試紙)를 다리 밑으로 던지는 일쯤이야 쇤네라고 못합니까유’라고 말했다.”
    (이우성·임형택 역편, 이조한문단편집, ‘일조각’, 233-234면.) 
    이 선비는 과거에 참여하여 답안지를 제출하기는커녕 
    늘 답안지를 다리 밑 하천으로 던져 종에게 비꼬임을 당했던 것이다. 
    
    ■ 양반체면 유지하려 실력 없어도 응시 
    
    조선 시대 때 과장에 출입하는 것은 양반 행세를 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지방의 유생이 서울에 올라와 과거시험을 한 번 치르는 데는 교통비, 숙식비 등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지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더구나 실력이 없어 답안지를 제출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체면’을 의식해 
    과거에 몰렸으니 과장이 터져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응시생들은 한바탕 난투극을 치르고 나서 접을 모아 장막을 치고 자기 자리를 
    확보해 앉는다. 시험문제를 기다린다. 임금이 들어와 전좌하고 난 뒤 내시가 
    시험문제를 현제판에 내다 건다.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이 묘사됐다. 
    “관풍각(觀豊閣) 지나시고 관덕정(觀德亭) 지나셔서 보탑(寶榻)에 전좌(殿座)하사 
    군병(軍兵) 방위(方位) 정한 후에 어악(御樂)이 일어나며 모대(帽帶)한 환시(宦侍)네가 
    어제(御製)를 고이 들고 현제판(懸題板) 임하여서 홍마삭(紅麻索) 끈을 매어 
    일시에 올려 다니 만장중(滿場中) 선비들이 붓을 들고 달아난다.” 
    선비가 현제판에서 문제를 베껴 자기 접으로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부정이 시작된다. 
    “각각 제 접 찾아가서 책행담(冊行擔) 열어놓고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풍우(風雨)같이 지어내니 글 하는 거벽(巨擘)들은 구구(句句)이 읊어내고 
    글씨 쓰는 사수(寫手)들은 시각을 못 머문다.” 
    ‘책행담’이란 무엇인가. 행담은 싸리나 버들로 만든 작은 상자다. 
    말하자면, 요즘의 책가방과 같은 것이다. 이 가방 속에는 예상 답안지와 참고서적 
    등이 들어 있었다. 시험장에 책을 들고 들어간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협서(挾書)’라고 한다. 협서는 조선시대 과거에서 
    이뤄졌던 커닝의 대표적 방법이었다. 예컨대 ‘성종실록’ 18년 2월23일에도 협서를 한 
    사람이 보이는데 그것은 엄연한 범죄였다. 하지만 이수광(李?光, 1563-1628)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그의 시대에는 법이 해이해져 응시생들이 드러내놓고 
    책을 가지고 들어가 과장이 마치 책가게와 같았다고 한다. 
    ‘지봉유설’은 광해군 6년(1614)에 탈고되었으니,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반에 이미 과장의 법이 극도로 문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자신의 시대에 협책 금지령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증언했다. 
    그는 “응시생들은 과장에 들어갈 때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들어갔고 
    과장에 들어간 사람 가운데 글을 직접 짓는 사람은 
    1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거벽(巨擘)’과 ‘사수(寫手)’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거벽은 과거 답안지의 내용을 전문적으로 대신 지어주는 사람이고, 
    사수는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사람이다. 일종의 대리시험행위자인 셈이다. 
    거벽과 사수를 고용해 데려가면 자신은 전혀 작문을 할 필요도, 
    글씨를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접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거벽과 사수 등과 어울려 한 팀을 이루는 것이 바로 접인 것이다
    (물론 거벽과 사수 없이 한 접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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