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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과거제도- (4 )
    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2019. 4. 12. 11:02



    
    ■ 시험장에 책 갖고 들어가 버젓이 커닝 
    
    ‘청구야담(靑邱野談)’에 ‘편향유박생등과(騙鄕儒朴生登科)’라는 작품이 있다. 
    “시골 유생을 속여 박생이 과거에 합격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박생은 영조조의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다. 
    박문수는 원래 문필이 짧은 터라 과거 합격은 생각지도 못하는 인물인데, 
    시골 유생을 속여서 과거에 합격한다는 내용이다. 이야기인즉 이렇다. 
    박문수는 초시(初試)에 우연히 합격한 뒤 회시(會試)에 응시할 예정이었다. 
    그는 먼저 한양 성내를 돌아다니면서 어느 고장의 어떤 선비가 거벽이고 
    어느 고장의 어느 유생이 사수인가를 탐문하였다. 
    박문수는 이런저런 방도로 그들과 안면을 익혀 두었다. 
    시험날 거벽과 사수들은 자신들을 고용한 응시생들과 함께 입장하였다. 
    박문수는 그들을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거벽에게는 글을 지어달라 하고, 
    사수에게는 글씨를 써달라 하여 그것으로 합격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하지만 거벽과 사수가 과장에 우글거리고 있었던 사정은 더할 수 없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거벽과 사수는 소설에 등장할 정도로 이미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돈을 받고 과문(科文)을 대신 지어 주었던 거벽의 이름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옥(李鈺)이 지은 ‘류광억전(柳光億傳)’의 주인공 류광억은 실제 과문을 팔았던 사람이다. 
    그는 합천 사람으로 과문에 능하여 이것으로 생계를 삼았다. 
    어느 날 한양에서 파견된 시관(試官), 곧 경시관(京試官)이 영남에 내려와서 
    감사에게 영남 제일의 인재를 묻는다. 류광억이라고 대답하자, 경시관은 자기의 감식안으로 
    수많은 답안지 중에서 류광억의 답안지를 골라내어 장원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경시관의 감식안을 두고 내기가 벌어졌다. 이내 시험이 치러졌고, 경시관이 한 답안지를 보니, 
    과연 으뜸이 될 만하였다. 그는 그 답안지를 류광억의 작품으로 여겨 1등에 뽑았다. 
    그런데 또 다른 작품을 보니 그럴 듯하여 2등, 3등으로 계속 뽑았다. 
    그러나 그 답안지에는 모두 류광억의 이름이 없었다. 조사해 보니, 류광억이 돈을 받고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 주되, 받은 돈의 다과(多寡)에 따라 답안지의 수준을 조절했던 것이다. 
    경시관은 글을 보는 자신의 안목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류광억의 이름이 없었기에 
    그를 잡아 자백을 받아 자신의 감식안이 정확했다는 증거로 삼고자 하였다. 
    경시관은 애당초 류광억을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류광억은 체포령이 떨어지자 
    잡히면 죽을 것이라면서 자살하고 만다. 이렇듯 류광억이 돈의 다과에 따라 답안지의 수준을 
    조절했다는 것은 거벽의 대리시험의 경지가 고도로 발달해 있었음을 증언한다. 
    거벽과 사수는 과거의 모순에서 탄생한 존재였다. 
    이들은 원래 과유(科儒)였고, 유능한 과문의 작성자였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과거에 합격할 수 없어 결국 그들은 과문의 대필업에 종사하게 된 것이었다. 
    거벽과 사수의 손으로 답안지를 작성한 다음 순서는 무엇일까. 
    “경각에 선장(先場) 들어 위장군(衛將軍) 외는구나. 한 장 들고 두 장 들어 차차로 들어간다. 
    백장이 넘어서는 일시에 들어오니 신기전(神機箭) 모양이요, 백설(白雪)이 분분하다. 
    수권수(收卷數) 몇 장인고 언덕 같고 뫼 같구나. 사알(司謁) 사약(司쿫) 무감(武監) 별감(別監) 
    정원사령(政院使令) 위장군이 열 장씩 작축(作軸)하여 전자관(塡字官) 전자(塡字)하고 
    주문(主文) 명관(命官) 시관(試官) 앞에 수없이 갖다 놓네. 차례로 꼲을 적에 비점(批點) 치고 
    관별(貫別)한다. 그 외의 낙고지(落考紙)는 짐짐이 져서 낸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제출한 답안지를 한데 묶어 채점을 하는 장면이다. 
    희한한 것은 답안지가 백 장을 넘어서부터는 신기전처럼 날아서 들어오는 것 같고 또 흰 눈이 
    내리는 듯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답안지를 빨리 내기 위해 응시생들이 일대 경쟁을 벌인 것이다. 
    왜 답안지를 빨리 내려고 했을까. 앞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인 것 역시 
    답안지를 빨리 내고자 하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은 ‘조정(早呈)’이라 한다. 
    조선후기 과거 관련 자료들은 조정의 폐단을 수없이 지적하고 있다. 모든 과거는 주관식이었다. 
    주관식 답안지는 다 읽어보기 전에는 평가할 수가 없으며 또 주관식이기에 채점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거 응시자가 늘어나면서 그 많은 답안지를 
    꼼꼼하게 읽어보고 점수를 매기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한양가’는 당시 답안지의 양이 ‘언덕 같고 뫼(山) 같다’고 표현한다. 
    
    ■ 답안지 빨리 낸 사람이 합격률 높아 
    
    정조 24년 3월21일 경과의 정시(庭試) 초시(初試) 답안지는 3만8614장, 
    이튿날인 3월22일 인일제의 답안지는 3만2884장이었다. 이 과거는 국왕 친림의 시험이고 
    당일날 결과를 공포하는 즉일방방(卽日放榜)이었다. 하루만에 모든 답안지를 검토하고 
    합격자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판이니, 채점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답안지의 앞머리만 훑어보고 채점을 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일찍 제출한 답안지 중에서 주로 합격자가 나오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실제 정조 21년의 실록 자료에 의하면, 그 해 가을 감시(監試)의 이소
    (二所, 두 번째 시험 장소)에서 합격한 답안지는 최초로 낸 300장 안에서 거의 다 나왔다고 하였다
    (정조실록, 21년 9월24일).
    채점을 하는 시관(試官)은 일찍 낸 답안지만 보고 채점을 했던 것이고, 나머지 답안지는 
    채점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일찍 제출한 답안지에서 합격자가 나오자, 
    응시생들은 답안지의 서두만 대충 써서 일찍 제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조정의 폐단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답안지를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내도록 한다든가, 
    늦게 낸 답안지에서 합격자를 선발한다든가 하는 오만가지 대책이 마련되었으나, 
    조정의 폐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같이 조선후기의 과거에선 부정이 풍습과 관례가 되었다. 범죄라는 의식도 없었다.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타락에 타락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제 그 타락의 최후의 모습을 보자. 김구(金九) 선생의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풍경이 실려 있다. 
    
    ■ 백범 김구, 조선 마지막 과거시험 비판 
    
    백범은 정문재(鄭文在)라는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정문재는 과유(科儒)로는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1892년 조선조 마지막 과거가 시행됐다. 
    백범은 아버지가 어렵사리 마련한 장지(壯紙) 다섯 장에 처음으로 답안지 글씨를 연습하고 
    정문재를 따라 해주(海州) 과장에 들어갔다. 과비(科費)가 없어 과거 보는 동안 먹을 좁쌀을 
    등에 지고 갔다니, 가세가 어지간히 어려웠던 모양이다. 
    백범이 전하는 과장의 모습은 이렇다. 
    “관풍각(觀豊閣, 宣化堂 옆) 주위에는 새끼줄로 그물을 엮어 둘러치고, 열을 지어 이른바 
    부문(赴門)을 한다는 것인데, 선비들은 흰 베에 산동접(山洞接) 석담접(石潭接) 등 
    그 접의 이름을 써서 장대 끝에 매달았고, 저마다 종이 양산을 들고서 도포에 유건을 쓴 모양으로 
    제 접의 자리를 먼저 잡기 위해 용사들은 선도로 밀려들고 있었다. 이 대혼잡을 이루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과장에는 노소 귀천이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고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이 구걸하는 일인데, 관풍각을 향해 새끼그물에 머리를 들이밀고 
    큰 소리로 외쳐대는 것이다. 
    ‘소생은 성명이 아무개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생하면서 과시(科時)마다 내 참가하였던 바, 
    금년 나이 70도 훨씬 넘었사오니 다음에는 다시 참과(參科)하지 못하겠습니다. 
    초시라도 한번 급격이 되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고함을 질러대고, 또 어떤 이는 목놓아 울어대는 것이다. 
    그 모습은 비루해 보이기도 하고 가련해 보이기도 했다.” 
    ‘한양가’보다 더 생생한 묘사다. 더 읽어보자. 
    “우리 접에 와서 보니 선생과 접장들이 작자(作者)·작서자(作書者) 등을 쓰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늙은 선비들이 걸과하는 모양을 말하고 이렇게 청했다. 
    ‘이번에 제 이름으로 말고 제 부친의 명의로 과지(科紙)를 작성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은 내 말에 감탄하시며 쾌히 승락했고 접장 한 분이 또 찬성해 주셨다. 
    ‘그럴 일이다. 네 글씨가 나만은 못할 터이니 너의 부친의 명지는 내가 써 주마. 
    후일 네 과거는 더 공부하여 네가 짓고 쓰고 하여라.’ 
    ‘네,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이 날은 아버님의 이름으로 과지를 작성하여 
    새끼그물 사이로 시관을 향해 들여보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듣고 있었다. 시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시관에게는 뵈지도 않고 과지 한 아름을 도둑질해 간 놈들도 있었다. 
    또 과장에서 글을 짓고 쓸 때에는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들었다. 이유는 글을 잘 지을 줄 모르는 자가 남의 글을 보고 가서 
    자기의 글로 써서 들인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이런 괴이한 말도 들었다. 
    돈만 많으면 과거도 할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큰 선비의 글을 몇 백 냥, 몇 천 냥씩 주고 사서 
    진사도 하고 급제도 한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번 시관은 누구인가에서부터, 서울 아무 대신이 편지를 내려보냈으니 
    틀림없이 된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있고, 
    시관의 수청기생에게 주단 몇 필을 선사했으니 이번에는 꼭 급제를 한다고 
    장담하는 자도 있었다.”(원본 백범일지 28~30면) 
    이것이 과거의 마지막 모습이다. 더할 수 없는 타락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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