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조 때 1회에 무려 11만명 응시
과거를 치르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글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 점에서 ‘한양가(漢陽歌)’에서 묘사하고 있는 19세기 중엽의 과거시험 장면은
흥미로운 것이다. 워낙 긴 것이기에 중요한 장면만 인용한다.
“춘당대(春塘臺) 높은 언덕 영화당(暎花堂) 넓은 뜰에 배설방(排設房) 군사들과
어군막(御軍幕) 방직(房直)이가 삼층 보계판(補階板)을 광대하게 널리 무고
십칠량(十七樑) 어차일(御遮日)을 반공에 높이 치고…”
과거를 치르는 장소는 창경궁(昌慶宮)인 듯하다.
창경궁의 춘당대 영화당 넓은 뜰에 어좌(御座)를 설치했다. 임금이 친림하는 과거였다.
임금이 친림하는 과거는 알성시, 정시, 춘당대시 등이었으니, 아마도 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제 과장 입장을 기다리는 과거의 주인공인 과유(科儒)들의 모습을 보자.
“선비의 거동 보소, 반물 들인 모시 청포(靑袍) 검은 띠 눌러 띠고,
유건(儒巾)에 붓주머니 적서(積書) 복중(腹中) 하였으니,
수면(粹面) 앙배(央背) 하는구나. 기상이 청수(淸秀)하고 모양이 조촐하다.”
반물은 검은 빛을 띤 짙은 남색이다. 이 색을 들인 모시 청포를 입고, 검은 띠에 유건을 썼다.
글 읽고 몸 닦은, 단정한 선비 차림이다. 그러기에 기상은 청수하고 모양은 조촐하다지 않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은 청수하고 조촐한 선비의 상과는 전혀 딴판이다.
“집춘문(集春門) 월근문(月覲門)과 통화문(通化門) 홍화문(弘化門)에 부문(赴門)을 하는구나.
건장한 선접군(先接軍)이 자른 도포 젖혀 매고 우산에 공석(空石) 쓰고 말뚝이며 말장이며
대로 만든 등(燈)을 들고 각색 글자 표를 하여 등을 보고 모여 섰다.
밤중에 문을 여니 각색 등이 들어온다. 줄불이 펼쳤는 듯 새벽별이 흐르는 듯
기세는 백전(白戰)일세, 빠르기도 살 같도다.”
‘부문(赴門)’은 문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즉 과장으로 입장하는 것이 부문이다.
입장하는 문은 넷이다.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고, 나머지 집춘문, 월근문,
통화문은 창경궁 담장에 있는 작은 문이다. 이 네 문으로 거자(擧子)들이 입장한다.
그런데 시험장에 들어서면 항시 긴장되어 조용한 법인데 법석대는 분위기라고 한다.
또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장에 입장하는데 그 모습이 야단스럽다고 한다.
또 ‘건장한 선접군’이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과장은 지금의 시험장과는 달리
번호가 매겨진 자기 좌석이 없었다. 과장에 들어서면 무조건 좋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좋은 자리란 시험문제를 빨리 볼 수 있는 곳, 시험 문제를 빨리 낼 수 있는 곳이 으뜸이다.
어쨌건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입장해야 해야 하는데,
이때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부문에는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는 입장(入場)’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몸싸움을 전문적으로 떠맡은 건장한 사람들이 바로 선접군이다.
선접군은 자른 도포를 젖혀 매어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우산과 말뚝 막대기(말장) 등
이상한 도구들을 들고, 자기 접(팀)이 인지할 수 있는 표시를 한 등을 밝히고 문 앞에 선다.
밤새 기다린 끝에 문이 열린다. 등불은 줄불 흐르듯
새벽별이 흐르듯 화살처럼 쏟아져 들어간다.
왜 이렇게 자리를 잡기 위해 밤을 새우며 기다렸던가.
자리 경쟁은 바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응시자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과거 응시자는 늘어났다. 정조 24년 3월21일 경과의 정시(庭試) 초시(初試)에
응시한 사람은 11만1838명이었고, 받아들인 시험지는 3만8614장이었다.
이튿날인 3월22일 인일제에는 응시자가 10만3579명이었고, 받아들인 시권은
3만2884장이었다(정조실록). 이틀에 걸쳐 21만명 이상의 응시생이
한양 성내에서 시험을 쳤던 것이다. 영조 15년의 알성시에 응시한 사람은
1만7000~1만8000명이었으니, 영조 15년에서 정조 24년까지 61년 동안
과거 응시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당시 한양의 성곽 안의 인구는 20만에서 30만 사이였다.
서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이 과거를 치렀던 것이다.
지금 서울 인구를 1000만으로 잡고, 50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행정고시, 사법시험을 치러
서울에 들어오는 것과 비유할 수 있다.
요즘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서울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 것이다.
이런 판이니 과장에서 좋은 자리를 잡는 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 좋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 폭력 난무
그렇다면 이들이 모두 과거 공부를 한 순수한 수험생이었을까?
우하영(禹夏永)은 ‘천일록(千一錄)’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철이 되면 한양과 시골의 빈둥거리며 놀고 먹는 잡된 무리들이
‘관광(觀光)’이라 핑계를 대고 세력가의 수종(隨從)이 되기를 자원해
부문(赴門) 쟁접(爭接)을 자기를 내세우는 노고와 공로로 삼는다”
(‘용인’, 천인록).
이들이 바로 선접군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세력가의 수종이 되어 과장에서
부문과 쟁접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원래 목적이 과거를 치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의 속셈은 시험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쟁접(爭接)이란 말이 나왔으니, 이것부터 먼저 언급하자. 다시 ‘한양가’다.
“현제판(懸題板) 밑 설포장(設布場)에 말뚝 박고 우산 치고 후장 치고 등을 꽂고,
수종군(隨從軍)이 늘어서서 접(接)마다 지키면서 엄포가 사나울사
그 외에 약한 선비 장원봉(壯元峰) 기슭이며 궁장(宮墻) 밑 생강밭에
잠복 치고 앉았으니 등불이 조요(照耀)하니 사월 팔일 모양일다.”
과거 시험은 따로 문제를 인쇄한 종이를 나눠주지 않는다.
문제를 적은 현제판(懸題板)에 가서 본인이 직접 문제를 적어와야 한다.
따라서 현제판 가까이에 자리를 잡는 것이 최고다.
현제판 근처에 도착하면, 자기의 접을 부르고, 장막을 치고 자리를 깐다.
그리고 우산을 씌운다(왜 선접군이 말뚝과 말장, 우산을 지참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접이란 한 팀을 말하는 바, 과장에서 상부상조하는 한 팀이다.
접과 접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것이 쟁접이다.
쟁접은 격렬한 몸싸움이었다. 다시 우하영의 말을 들어보자.
“부문할 때는 짓밟는 폐단이 있고, 쟁접할 때는 치고 때리는 습관이 있다.
밟히면 죽게 되고 치면 다치게 된다.”
부문과 쟁접에서 주먹질 발길질이 마구 오간 듯하다.
자연 힘깨나 쓰는 자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세력가에게 자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듯하다. 이 자원한 선접군들은 부문과 쟁접에서 힘을 쓴 대가로
세력가의 도움을 받아 남의 글과 글씨를 빌려 답안지를 작성해 제출한다.
고시관은 그것이 차작(借作)인지 차필(借筆)인지 모르므로, 이들이 간혹 합격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할 일 없는 어중이떠중이가 권세가의 수종군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우하영은 “과장의 득실은 알 수 없다”(場中得失, 未可知也)는
당시 속담을 인용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과장은 실력보다 운이 통하는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과장은 국가의 인재를 선발하는 신성한 장소인 데도
폭력이 난무하고 사상(死傷)이 다반사인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시험을 치르는 곳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은
일면 충격적이다. ‘한양가’가 쓰여진 것은 19세기 중반이지만
이것이 비단 19세기만의 현상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박제가의 ‘북학의’에 따르면
이미 18세기에도 엄연히 존재하던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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