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오사화(戊午史禍)
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사림 세력은 성종 대에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 등
영남출신 사류들이 등용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
훈구파들의 장기집권에 따른 비리를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훈구파의 보복으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제거된다.
물론 중종 대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그러나 역시 훈구파의 강한 반발로 또다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꺾이고 만다.
연산군 대와 중종 대 그리고 명종 대에 걸쳐 네 차례나 사화(士禍)가 일어났으니
역사는 이것을 ‘4대 사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4대 사화는 선비들에 대한 옥사이긴 하지만 그러나 다른 옥사처럼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 다른 사화를 야기 시키는 악순환이었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 정면충돌에
이르게 되는데 그 시작은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史禍)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다른 사건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해서다.
성종 때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이 등장, 정계로 진출하여 3사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자 이에 대항하여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으로 보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공교롭게도 거기에 사초가 있었다.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그 단초는
‘조의제문'이라는 사초였다. 현재 고려시대의 것은 전하는 것이 없고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이 대표적인데 ’실록‘이란 역대 임금의 사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국왕이 죽으면 신왕의 즉위와 함께 실록청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전왕의 사적을
편찬하게 되어있었다.
실록청에는 총재관과 그 실무자인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여 여러 부서로 나뉘어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사초(史草)‘란 역사(주로 실록)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을 말하는데 봉교 이하 8명의 사관이 교대로 궁중에 숙직하면서
조정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참여하여 정사의 잘잘못과 국왕의 언동, 인물의 선악 등을
일정한 형식을 따라 기록한 것을 말한다.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임금이 죽은 후
정해진 시간 내에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개별적으로 보관하였다.
무오사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초는 정치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국왕을 포함한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연산군도
문제가 되는 부분만 뽑아 보았을 뿐이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극배 등과 함께 조선 시대 5극(형제지간임)의 한 사람인 이극돈은 훈구파의
거물로서 광해군 대의 대북파의 영수인 이이첨은 그의 후손이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이 ‘조의제문'이다.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로 비쳐졌는데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사초에 적어 넣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 듯 했다. 문제는 다른 하나,
바로 이극돈의 비행을 기록한 한 장의 상소문이었다. 이 한 장의 상소문이
풍지풍파 피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일찍이 이극돈은 전라감사로 있다가 세조비 정희왕후가 죽은 후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린 일이 있었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던 김일손이
그 사실을 상소하려고 할 때 이극돈은 그에게 부탁에 부탁을 했으나
김일손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결국 이극돈은 이 사건으로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김일손을 원수대하 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 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김종직이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이극돈이 가져온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를 숙청할 목적으로,
당시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구세력과 모의한 뒤 사림세력을
싫어하던 연산군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부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내용이었다.
상소문을 읽은 연산군은 옳커니 하고 즉시 김일손을 문초했다. 물론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김종직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한 바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사건의 중심이자 훈구파의 타켓인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체의 목을 베어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밖에 정여창․이수공․정승조․홍한․정희랑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냈으며, 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진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이극돈․유순․윤효손․어세겸 등은 수사관
(실록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사초를 보고하지도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허침․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사화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인
이극돈은 파면되고 어부지리로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권을 잡는 어처구니없는 형국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구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사신은 옥사가 진행되는 도중
그 해 9월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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