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묘사화(己卯士禍)
세 번째의 기묘사화(己卯士禍) 역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1515년 폐비 신씨 복위문제와 관련해 일어난 조신들간의 알력이 발생한 이후, 조광조 일파가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배로 취급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자 감정대립이 심해졌고,
여기에다 삭훈 사건이 직접적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데타적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에 성희안․박원종 등이 폐주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으로 재위 12년간 화옥과 황욕 등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연산군을 폐하기로 밀약한 성희안과 박원종은 1506년 9월 1일,
무사를 규합하여 훈련원에 모인 후 먼저 권신 임사홍,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였다. 그리고는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성종의 계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가 바로 중종인데 중종은 반정공신 세력에 밀려
조정의 주도권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에 공신세력을 견제하기위해 신진 사림세력이자
급진 개혁론자였던 조광조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훈신, 척신 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이게 되니 이로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 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하고, 명망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는,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실시를
강행하고, 현량과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현량과를 통해
도학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한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본격적인 훈신 제거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위훈삭제사건으로 이어진다.
훈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신들의 세력을 위축시킬 필요가 있었고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정공신 중에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는 이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반정공신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광조는 성희안, 유자광 등을 신랄히 비난하였는데
성희안에 대해서는 반정을 하지않았는데도 공신으로 책복되었다고 했고, 유자광에 대해서는
귀족들의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반정하였으므로 이러한 류의 반정은 소인배들이나 꾀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조광조의 주장에 대해서 중종은 반정공신은 한 번 정한 것이니
수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리 쉽게 결정될 일이 아니었다. 공신을 내친다는 것은
바로 반정에 의해 왕이 된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조광조의 설득은 집요했고 중종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반정공신 2, 3등 중 일부를 3, 4등으로 개정하고, 4등 50명은 모두 공도 없이
녹을 받아먹고 있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그 대안을 받아들여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적이 삭탈 일보 직전에 놓이자
훈구세력들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중종 역시 현실적으로 정치 원로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공신세력을 일거에 몰아내는 것은 자칫 조정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것이라는 판단에 더 이상 조광조의 급진적인 행동을 방치할 수 없었다.
중종의 이런 내면을 읽은 훈구세력은 조광조를 몰아내기 위한 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긴다.
조광조를 몰아내는데 앞장 선 사람은 사림파로부터 소인배로 비난받던 남곤과 공신자격을
박탈당한 심정, 그리고 한때 조광조의 탄핵을 받아 실권할 지경에 처했던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등이었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하여 중종에게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하면서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쳐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 즉 조광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한편 홍경주와 남곤, 김전,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성하여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했다. 이들의 상소가 있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일단의 사림세력을 치죄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이 투옥되었다. 이들이 투옥되자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세력들은 그들을 당장에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이장곤, 안당, 정광필 등이 반대하였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 남곤, 이유청 등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곧 사사되었다.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도 귀양갔다가 사형되거나
자결했으며, 그밖에 김구, 박세희, 박훈, 홍언필, 이자,
유인숙 등 수십명이 귀양길에 올랐다. 아울러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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