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사화(甲子士禍)
두 번째의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그 중심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서 있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처럼, 훈구․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무오사화가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간의 정치투쟁이었다면
갑자사화는 왕(연산군)을 중심으로 한 궁중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세력의 힘의 대결이었다.
비록 이극돈과 유자광의 계략에 의해서였지만 1498년 무오사화로
눈엣가시였던 사림들을 대거 제거한 연산군은 사치와 낭비의 극치를 보였다.
그 결과 국고가 바닥이 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자 연산군은 공신들의
재산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 바로 갑자사화의 주역 임사홍이다.
임사홍은 일찍이 두 아들(예종과 성종의 사위)을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잔여 사림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낸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는데 결정적으로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왕과 인수대비의 진노를 사서 1479년에 폐출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사되었다.
그리고 성종은 추후에는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김으로써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이 투기가 심해
후궁만 총애하는 왕과 그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하였다는 등의 잘못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와 정숙의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그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그리하여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일이 크게 벌어졌다.
윤씨의 폐출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리하여 연산군의 엄청난 살인극은 시작되었다.
연산군은 우선 자신의 어머니인 윤씨를 폐비시킨데 일조한 성종의 두 후궁
엄 귀인과 정 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 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정․엄 두 숙의와
한 패라 하여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를 무시하고
왕비로 추승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장 60에 용궁에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옥사했으며 이행은 충주에 유배, 이어 함안에 이배된 후
거제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고자 할 때 이에 찬성한 윤필상․이극균․성준․이세좌․권주․김굉필․
이주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고인이 된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
이파․정여창․남효온 등의 명신거유 등을 부관참시하였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강백진,
최부, 심순문, 김천령, 조지서, 정성근,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와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참고로, 갑자사화의 주역인 임사홍은 사회를 일으킨 후 같은 해 수차에 걸쳐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모면하고 권세를 누리다가,
1506년 중종반정 때 추살되고 이어 부관참시되었다.
비록 간신(?)이지만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서거정묘비명>은 임사홍이 쓴 것이다.
연산군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분분한 편이나 실제로는 연산군의 폭동을
그의 ‘패악한 본성’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곳이 많다. 역사가들은 연산군이 5∼6년 동안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인 것.
특히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던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연산군이 그토록 포악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지만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치 못해 문리(文理)에 어두웠던 인물로 묘사돼 있다.
어쨌든 연산군이 이같이 큰 참극을 벌인 까닭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싫어했던 선비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이 무서운 사화는 그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는 급격히 침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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