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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반촌(泮村)-<3>
    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2019. 3. 11. 15:38



    
    ■ 성균관과 불가분의 관계
    
    반촌민의 형성과 관련, 또 하나 사료가 윤기(尹햍, 1741~1826)가 남긴 시다. 
    윤기는 오랫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성균관에 기거했던 인물인데, 그는 자신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반궁잡영(泮宮雜詠)’이란 220수의 독특한 한시를 남기고 있다. 
    그는 220수의 한시에서 성균관의 역사, 교육, 학생회 조직, 학생 처벌, 학생들의 집회, 결사 등등 
    성균관에 관한 거의 모든 일을 한시로 읊어내고 있다. 우리나라 학교사, 교육사, 풍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희귀한 자료인 것이다. 여기에 반촌과 반인에 관한 언급이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의 유약(有若)이신
    안문성공(安文成公)은
    선성(先聖)의 초상과 경전을 사오시어
    다시 학교에 두셨지.
    백 명의 노비
    후손들이 번성해
    지금도 제단을 세워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드네.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 있다. 
    “안문성공 향(向)은, 본명이 구슬 옥(玉) 변의 향(珦) 자인데, 어휘(御諱, 임금의 이름)를 피한 것이다. 
    고려의 찬성사(贊成事)로 학교가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중국에 돈을 보내어 선성(先聖, 공자)과 
    제자 70명의 초상, 그리고 제기(祭器)·악기(樂器)·경적(經籍)을 구입해 오게 하였다. 
    국학을 세우고, 노비 백 명을 바쳤는데, 지금의 반인(泮人)은 모두 그 노비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반촌의 북쪽에 제단을 세우고 문성공의 기일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데, 
    애모와 정성을 바침에 있어 조금도 게으르지 않다.” 
    서명응의 ‘안광수전’과 같은 내용이다. 안향이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의 후손들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서울로 따라와 서울의 성균관에 그대로 복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명응과 윤기의 기록이 18세기 후반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안향으로부터 거의 5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이다. 반촌민(泮村民)이 유전학적으로, 
    아니 계보학적으로 500년 전 노비들의 후손인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중간에 임진왜란과 같은, 
    성균관을 잿더미로 만든 미증유의 사건이 있었음에랴. 하지만 조선 후기 반인들은 자신들이 
    안향의 노비의 후손이라는 점을 믿고 있었고, 또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알았던 것이니 무슨 상관이랴. 
    반촌의 형성 유래가 이러했으므로, 반촌의 거주자 반인(泮人)의 삶은 성균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대사성(大司成) 이하 관료조직과 
    교수진이 있었고, 유생들이 있었다. 이들을 위한 자질구레한 노역(주로 육체노동)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욱이 성균관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강의동인 
    명륜당(明倫堂) 이외에도 숱한 건물이 있었다. 예컨대 학생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기숙사(東齋·西齋)와 식당이 있었다. 이런 건물을 관리하고, 학생들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반인들은 바로 이 성균관의 잡역을 세습적으로 맡아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윤기의 시를 보자. 
    관비(館婢)의 소생은
    직동(直童)이 되고
    다른 계집종 자식은
    서리(書吏)에 이름이 오른다네.
    재직(齋直)은 장성여
    수복(守僕)이 되니
    반인(泮人)들이 지는 역은
    본디 길이 다르다네. 
    여기에도 주석이 붙어 있다. 
    “이것은 반인(泮人)들의 신역(身役)이 각각 다름을 읊은 것이다. 관비의 소생은 재직(齋直)이 되고, 
    다른 계집종에게서 난 자식은 서리(書吏)가 된다. 재직은 장성하면 수복(守僕)이 된다. 
    반인들도 그 신역이 각각 다른 것이다.” 
    반촌의 남자가 성균관 소속의 계집종과 관계하여 자식(아들)을 낳을 경우, 그 자식은 성균관의 
    직동이 된다. 직동은 재직인데, 재직이란 성균관의 기숙사인 동재·서재의 각 방에 소속되어 유생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다. 재직(직동)이 장성하면, 성균관 내의 제향에 관련된 육체노동을 맡는 
    수복이 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반인이 관계한 여자가 성균관 이외의 계집종이라면, 
    그 자식은 서리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서리 역시 성균관의 서리일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반인의 사회적 지위란 대단히 낮은 것이었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옥(李鈺, 1760~ 1813)의 ‘호상관각력기(湖上觀角力記)’란 글을 보면, 
    호상인(湖上人), 곧 마포 일대의 주민들과 반인들이 마포 북쪽의 도화동(桃花洞)에서 
    씨름을 겨루는 풍속을 소개하고 있는데, 호상인이란 마포 일대의 짐꾼이나 막노동자들이었으니, 
    반인들의 사회적 지위란 이들에 상응하는 사회의 저층이었던 것이다. 
    
    ■ 조선시대의 여관촌 
    
    반촌의 반인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균관과 공적인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유생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반촌은 평소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방을 잡아 
    공부하는 하숙촌인가 하면, 과거철이면 거자(擧子)들이 주인을 정하여 머무르는 일종의 
    여관촌이기도 하였다. 정조 5년 11월4일 사성(司成) 채정하(蔡廷夏)는 과거철이 되면, 
    성균관 유생들의 절반은 성균관에 머물면서 성균관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절반은 반촌에서 
    기식하고 있다면서 성균관 식당의 정원을 늘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정조실록’ 5년 11월4일).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반촌에서 머무르는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식당의 정원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보다 훨씬 전인 신임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기지(李器之)도 기해년 봄 
    증광 초시(增廣初試) 때문에 반촌(泮村)에 나가 거접(居接)하여 여름을 넘기고 가을로 접어들 때까지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경종실록’ 2년 5월5일). 아마도 기숙사 식당의 밥보다는 하숙집 밥이 
    나아서였을까. 아니면 기숙사의 딱딱한 규정을 지키기 싫어서였던 것인가? 
    하숙촌이 된 반촌이 빚어낸 가장 흥미로운 사건은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의 
    천주교 학습 사건이다. 1787년 10월 이승훈과 정약용, 강리원(姜履元) 등은 과거 공부를 핑계대고, 
    반인(泮人)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진도자증(眞道自證)’ 등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이기경(李基慶)에게 발각된다. 이 사건이야 천주교사에서 널리 다루는 것이어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성균관 일대의 하숙촌이 일종의 이념서클의 온상 같은 역할을 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여간 흥미롭지 않은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반촌 사람 김석태의 제문이 다산의 문집에 
    ‘숙보(菽甫)의 제문(祭文)’(숙보는 김석태의 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읽어보자. 
    지극한 정성은 하늘에 통하고 지극한 정은 땅까지 통하였네. 깬 것도 나를 위해 깨고 자는 것도 
    나를 위해 잤었네. 가정에 소홀하면서도 나를 위해서는 치밀하였고 달리고 쫓는 일에는 동작이 
    느렸으나 나를 위해서는 빨랐네. 나의 잘못을 남이 지적하면 칼을 뽑아 크게 성내었고 사람이 나와 
    잘 지내면 그를 위해 온 힘을 다 쓰더니, 혼마저 천천히 감돌며 아직 내 곁에 있네. 
    구원(九原)이 비록 멀다고 하나 앞으로 서로 생각하리. 
    반촌인의 이름이 좋은 의미로 기록에 남은 것은 김석태가 유일한 경우이리라.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보잘것없는 인물에 대한 다산의 제문이 여간 다정스럽지 않다. 
    다산의 인품을 보는 듯하다. 
    자, 그렇다면 반촌이란 말은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고려사’에 반촌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아마 반촌이란 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또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조선 전기 문헌에서도 반촌이란 명사를 본 적이 없다. 
    오직 ‘선조실록’ 39년 6월15일조 기록에 무슨 일로 성균관 노비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령(使令)들을 
    ‘반촌(泮村)’에 곧장 보내어 성묘(聖廟)의 내정을 시끄럽게 했다는 말이 나온다. 선조 39년이면 
    1606년, 임진왜란 이후이다. 임진왜란을 거친 뒤 성균관이 재정비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성균관 일대의 마을을 반촌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지만, 이것도 확언할 수는 없다. 
    반촌에서 소를 도살하게 된 기원 역시 정확하지 않다. 조선 전기에는 유관한 기록을 찾기 어렵고, 
    17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반촌과 소의 도살에 관한 자료가 보인다. 
    ‘숙종실록’ 24년(1698) 1월21일조에 호조 판서 이유(李濡)가 반인(泮人)들에게 2개월을 한정하여 
    도살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사료가 있으니, 적어도 숙종 연간에 오면 반인이 국가의 공인을 얻어 
    소의 도살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 소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 이 시기에 와서 반인이 소의 도살과 쇠고기 판매에 종사하게 되었는지도 역시 분명하지 않다. 
    조심스럽게 추정하자면, 반촌민의 도살은 성균관 학생들의 식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종실록’ 7년 10월30일조에 의하면, 원래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쇠고기를 반찬으로 제공한 것이 
    오랜 유래였는데, 성균관에서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한다는 일부 학생들의 의견이 있어, 회의를 열어 
    결정을 보았던 바, 재(齋, 기숙사)와 명륜당에서는 먹고 식당에서는 먹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좀 유별난 짓거리가 아닌가 하는데, 과연 이 기사를 쓴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학생들의 행동이 
    특이한 체하는, 즉 뭔가 튀어보려는 행동으로 생각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쨌건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에 
    쇠고기를 제공하는 관습은 오래된 것이고, 이 때문에 반촌민들에게 소의 도살이 허락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반촌민들이 이를 계기로 서울 시내 쇠고기의 판매를 전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마 순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인용했던 유본예의 ‘한경지략’ 현방조에 “성균관의 노복들로 
    고기를 팔아서 생계를 하게 하고, 세로 바치는 고기로 태학생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고 한 말은 
    역시 이런 내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응란교 이북이 반촌 
    
    이제 쇠고기와는 결별하고 이 반촌민의 특수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늦었지만, 반촌의 위치를 챙겨보자. 반촌은 그 범위가 정확하게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6년 3월11일부터 3월26일까지 실린 ‘경성행각(京城行脚)’이란 기사에 의하면, 
    그 위치는 이렇다. 
    현금 경성식물원 입구 길 옆에 한 개의 석비(石碑)가 있으니, ‘응란교(凝? 橋)’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정조대왕이 이곳에 다리를 놓게 하시고, 그 곁에는 연지(蓮池)를 파서 부근의 풍경을 
    돕게 하심이니, 지금은 연지도 없고 다리의 흔적도 없으나, 석비만은 홀로 남았으며, 
    이 석비의 북쪽은 반인(泮人)이 거주하는 곳이요, 이남은 보통 인민의 주거지로 구별하였다. 
    경성식물원은 지금의 서울대병원과 동숭동 대학로 자리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 
    경모궁(景慕宮)터였다. 19세기 서울 지도를 보면, 창경궁 오른편에 경모궁이 그려져 있고, 
    경모궁의 오른쪽 위편에 궁지(宮池) 또는 연지(蓮池)라는 이름의 연못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것이 정조가 세운 응란교다. 이 응란교 이북이 반촌인 것이다. 
    윤기의 ‘반궁잡영’을 보면 좀더 정확하다. 
    하마비 남쪽에 
    길 하나 가로로 뚫렸으니,
    반촌의 경계는
    여기서 분명히 정해지네.
    지금 돌을 세워
    표시한 곳 어디메뇨.
    경모궁 연지의
    연꽃이 핀 곳이라네. 
    ‘매일신보’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 시에도 주석이 있다. 
    “옛날의 반촌은 관현(館峴)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을 경계로 삼았는데, 당저조(當흦朝, 정조)에 
    경모궁 앞 연지 가에 돌을 세우고 반촌의 경계로 삼았다. 연지 이북이 모두 반촌이다.” 
    원래 관현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이 반촌의 하한선이었으나(관현은 어디인지 미상), 정조 때 
    경모궁의 연지를 반촌의 하한선으로 삼았던 것이다. 반촌은 또 동반촌과 서반촌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은 성균관 쪽에서 경모궁 방향으로 곧장 내려오는 시내를 따라 난 길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은 
    동반촌, 왼쪽은 서반촌이 된다. 서반촌의 시작은 지금의 창경궁 월근문(月覲門) 앞의 박석고개부터다. 
    이상이 반촌의 지역적 구획이다. 그러나 이 구획은 단순히 행정 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반촌민이 아니면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 특별 구역이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매일신보’의 ‘경성행각’을 다시 들추어보자. 
    
    ■ 외부인 거주 허락 않은 별천지 
    
    반인이라 함은 즉 속설(俗說)에 소의 도살을 생업으로 삼는 자를 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다. 
    그러나 이 명칭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 상고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소문 안 부근 일대의 
    주민은 금일까지도 소 도살을 영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옛날에는 그 수가 곱절이나 
    많았음은 정칙(定則)이다. 그러나 이 영업을 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천하게 여겨 서로 교제와 
    혼인 관계를 맺지 아니하므로, 이 부락의 주민은 세인(世人)의 압박과 수치와 결교(結交)·
    혼인의 불허 등의 모욕을 당하는 관계로 인하여, 자연히 분개심을 야기하고 분격심이 일어나는 때에 
    이곳 주민들은 일체 단결되어 남을 위하여 의리를 세우는 데 생사를 돌아보지 않는 기개가 있었으며, 
    옛날에는 다른 동 사람으로서 이 동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며, 이 동 사람이 다른 동으로 이사 가서 
    사는 일도 없어서, 일개 별천지를 형성하였다. 
    반촌은 외부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일개의 별천지였던 것이다. 이런 풍습이 언제 
    형성된 것인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영조 때에는 이미 사회적 약속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실록’ 19년 11월6일 지평 조재덕(趙載德)은 외인의 입주가 불허된 반촌을 재상의 아들들이 
    점거하였다고 조사해 치죄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데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선후기의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만은 들어가서 조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금란이란 조선이 500년 동안 단속의 대상으로 삼았던 소나무의 벌채 금지, 
    임의적 도살의 금지, 양조(釀造)의 금지, 곧 금송(禁松), 금도(禁屠), 금주(禁酒) 등이 주종목인데, 
    범인이 반촌에 숨어버리면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것이다. 
    ‘영조실록’ 6년 10월11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말을 들어보자. 
    “형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의 말을 듣건대, 반인(泮人)이 한 짓이 매우 해괴하다 합니다. 
    북부(北部)의 장의동(壯義洞) 주위에 금송(禁松)의 정령(政令)이 행해지지 않기에 
    사람을 시켜 살펴봤더니, 반인의 무리가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기에 사람들이 잡으려고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하여 그대로 반촌(泮村) 안에 숨었는데,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엔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잡아낼 길이 없다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원래 서울 시내에서 소나무를 베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던 바(서울의 나무장수는 서울 시내에서 
    벤 나무를 판매하지 못한다) 반인이 장의동 주변의 생솔을 베어갔고, 체포하려 하자 도끼를 
    휘두른 뒤 반촌 안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일단 반촌 안으로 들어가면 금란이 미치지 못한다. 
    포교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영조는 성균관 대사성에게 반촌을 뒤질 것을 지시하지만, 이번에는 성균관에 기식하고 있는 
    유생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다. 권당(捲堂)이 그것인데, 이것은 식당에 들어가 식사하기를 
    거부하는 단식투쟁이다. 성균관 유생은 항의할 일이 있으면 종종 권당을 한다. 
    영조가 좋은 말로 달랜 끝에 유생들은 스트라이크를 풀었다. 
    실제로 성균관 근처에서 도둑을 체포하였다가 포도대장이 파직된 경우도 있었다. 
    ‘영조실록’ 41년 5월13일조에는 사간원에서 포교(捕校)가 반촌(泮村)에서 도둑을 잡았는데, 
    성묘(聖廟)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포도대장의 파직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반촌이 이렇게 독특한 구역이 된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포교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성묘(聖廟), 곧 대성전이란 성화(聖化)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반촌민이 다른 지역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이라는 점도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즉 반인들의 신분이 백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소의 도살과 판매에 관계하는 이상 천대를 받았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이로 인해 반촌민은 반촌 바깥 사람들과 친교, 결혼 등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이다. 반촌은 사실상 게토(ghetto)였던 것이다. 
    이것이 반촌을 특수한 구역으로 만든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게토화로 반촌민들은 독특한 에토스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했던 서명응의 ‘안광수전’의 “억센 자는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 노릇을 한다”는 구절도 그런 의식의 일단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폭력적인 것인데, 실제 그런 사례가 보이기도 한다. 
    정조 1년 7월15일 반인(泮人) 정한룡(鄭漢龍)이 환도(環刀)로 
    사람을 공격하여 무릎뼈가 절반이나 떨어져나갔고, 상해를 입은 사람이 
    그 상해로 인해 치명(致命)한 사건으로 인해 성옥(成獄:
    (살인 사건을 재판하는 것)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양반이나 보통 시민에게 기대되는 행동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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