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화가 성협(成夾)의 풍속화집 중 ‘고기굽기’ /야외에서 소고기를 숯불에 구워 먹는난로회(煖爐會)라는 풍속이 18세기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다
■ 하루에 도살되는 소가 500마리
서울은 조선시대 최대의 인구밀집 도시이고, 또 생활의 수준이 가장 높았으니,
당연히 음식과 요리의 수준도 다른 곳과 비할 바가 못된다. 서울은 생산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거의 모든 식료품이 서울 외곽 지역이나 지방에서 공급되었다.
이 식료품을 유통시키는 곳이 곧 시전(市廛)이었다.
시전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에서 국가와 왕실, 서울 시민들의 수요에 응하기 위해 설치한
공식 시장이었다. 시전에서 판매하는 물품을 분석해보면, 당대 서울 시민, 나아가 조선사람의
일상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식료품을 다루되, 고기류에 한정해 살펴보기로 한다.
유본예(柳本藝)는 서울의 인문지리지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시전(市廛)’에 시전의 종류와
판매 물품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바, 여기에 서울 시내에 판매되는 고기의 종류가 나온다.
쇠고기를 뺀 나머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생치전(生雉廛) 건치전(乾雉廛) 생선전-병문(屛門)에 있다.
닭전(鷄廛)-광통교에 있다. 계란전도 그 곁에 있다.
저육전(猪肉廛)-여러 곳에 있다.
생치는 산 꿩, 건치는 말린 꿩이다. 꿩은 아마 사냥으로 잡은 것일 터이다. 꿩고기, 닭고기와
돼지고기(猪肉)가 서울 시민들에게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이 쇠고기를 제외한 서울 시전에서
판매하는 고기의 종류다. 꿩을 제외하면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저육전이 여러 곳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돼지고기가 꿩과 닭에 비해 많이 소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쇠고기 쪽을 보자.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서울의 쇠고기 소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통계를 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
(犒饋 ,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成均館)과
한양 5부(部) 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역, 돌베개, 2003, 81면)
나라 전체에서 하루에 소 500마리를 도살한다는 것이 과연 정확한 통계 수치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이 숫자로 보아 여러 가지 고기 중에서 쇠고기는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고기였을 것이다. 쇠고기는 위에서 든 바와 같이 국가의 제사, 호궤(?饋) 등에 소비되는가 하면,
뇌물로도 인기가 있었다. 물론 모든 쇠고기의 최후는 음식으로 요리되어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특히 서울 사람들에게 있어 쇠고기는 일종의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편 박제가의 시대, 즉 18세기 후반기가 되면 서울 시정에 술집과 음식점이 출현한다.
시정에서의 고기 소비가 늘어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설렁탕과 너비아니는 서울 음식이 아닌가.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명에서 30만명 사이였으나, 쇠고기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생각해보면
서울 시내 24개의 정육점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이제 이 정육점에 대해서 좀더 소상히 살펴보자. 앞서 인용했던 유본예의 ‘한경지략’ ‘시전’ ‘현방(懸房)’조다.
현방(懸房)-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이다. 고기를 매달아서 팔기 때문에 현방이라 하는 것이다.
도성 안팎에 모두 23곳이나 있다. 모두 반민(泮民)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를 삼게 하고,
세(稅)로 내는 고기로 태학생(太學生)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
현방이란 쇠고기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푸줏간이다. 현방의 ‘현(懸)’은 원래 ‘달아맨다’는 뜻이다.
이것은 시전에 속하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정식 인허를 받은 공식적인 가게다. 현방은 도성 안팎에
23곳이 있다고 하는데, 서울 성곽 십리 안까지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해서 한성부의 관할에 속한다.
따라서 서울에 23곳의 정육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관계없다. 다만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24곳이라
했는데, 유본예는 23곳이라 하고 있으니, 어떤 사정으로 1곳이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방은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에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일제시대의 자료다.
지금은 고기 파는 집을 수육판매소(獸肉販賣所) 또는 ‘관(館)집’이라 하지만, 전일에는 ‘다림방’이라
하였다. 다림방은 한자로 ‘현옥(懸屋)’이니, 그때에는 소를 매달아서 잡는 까닭에 현옥이라 하였다.
그리고 현옥도 제한이 있어서 경성에 전부 오현옥(五懸屋)을 두었는데, 수표교 다림방이 가장 큰 것으로
수십년 전까지도 있었다.(‘경성어록(京城語錄)’, ‘別乾坤’, 1929년 9월호)
현방을 현옥이라 쓰기도 했고, 이것은 우리말로 ‘다림방’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경성에 전부 5곳의
현옥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일제시대 사람인 위 인용문의 필자의 기억에 그렇다는 얘기다.
이제 소를 도살하는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다. ‘경성어록’에 현옥(懸屋)도 제한이 있다고 한 말은
정육점의 허가가 자유롭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마도 현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이제 ‘한경지략’의 “모두 반민(泮民)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를 삼게 한다”는 말을 음미해 보자.
이 말은 ‘반민’만이 서울 시내에서 소를 도살하고 판매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민은 백정인가? 그렇지는 않다. 황재문(黃載文)은 1949년에 쓴 글에서 반민에 대해 언급하면서
백정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黃載文, ‘서울 동명에 숨은 이야기’, ‘民聲’, 1949, 11월호)
다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시내의 소의 도살과 판매를 독점했던 반민(泮民)이란 도대체 어떤 부류인가?
■ 반촌민은 안향의 노비 후손들
성균관을 다른 말로 ‘반궁(泮宮)’이라 한다. 반궁이란 말의 유래는 중국 고대로 소급한다.
주(周)나라 때 천자(天子)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벽옹(?雍)이라 하고, 제후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반궁(泮宮)이라 하였다. 반궁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반궁이란 말의 내력은 또 어떤 것인가? 반궁은 ‘반수(泮水)’에서 온 말이다. 벽옹의 사방은 물이다.
쉽게 말해 큰 연못 속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따라서 벽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서·남·북으로 놓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에 비해 반궁은 동쪽 문과 서쪽 문을 연결하는 선 한편만 물이다.
즉 연못은 반달 모양이 된다. 천자의 벽옹에 비해 물이 ‘반(半)’밖에 되지 않는다.
이 물을 반수(泮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인 것이고, 반수가 있기 때문에 그 건물을 반궁이라 부른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궁(宮)’은 궁전이란 뜻이 아니고, 단순히 건물이란 뜻이다.
이것이 성균관이 반궁이라 불린 내력이다. 이런 내력으로 인해 성균관과 관련된 곳에 흔히
‘반(泮)’자를 붙였으니, 성균관 주위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 하고
그곳의 주민은 반민(泮民), 반인(泮人)이라 불렀던 것이다.
반촌은 적어도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구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의 저명한 문인이자 학자인 서명응(徐命膺, 1716~87)이 쓴 ‘안광수전(安光洙傳)’
(‘保晩齋集’ 9권)에 반촌의 유래와 반촌 주민에 관한 소상한 언급이 나온다.
반촌은 고려말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자기 집안의 노비 100여 명을 희사하여 학교를 부흥할 것을
도운 데서 비롯된다. 본조(朝鮮)가 한양에 정도(定都)하여 국학(國學)을 옮기자, 노비 자손이 수천명이
되어 반수(泮水)를 둘러싸고 집을 짓고 살아, 거리와 골목, 닭울음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엄연히
하나의 동리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을 반촌(泮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자손들은 생장하면 반촌 밖을 나서지 않는다. … 총각이 되면 억센 자는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 노릇을 하며, 인색한 자는 말리(末利, 상업)를 좇아 예교(禮敎)를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안유는 곧 안향(安珦, 1243~1306)이다.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성균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유학의 진흥을 위해
충렬왕 30년(1304년) 5월 관료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여
성균관의 섬학전(贍學錢)을 조성하고, 이 돈의 일부를 중국의 강남에 보내
경전과 역사서 등을 수입하였던 바,
이로 인해 성균관의 교육 분위기는 일신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다음 달인 6월에 성균관의 대성전이 완성되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그는 고려말기 성균관의 부활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노비를
성균관에 기증했다 하여 이상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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