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풍속이 괴이하여 서울과 다르네
이제 반인들의 독특한 에토스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윤기의 ‘반궁잡영’이다.
반인은 원래
멀리 송도(松都)에서 온 사람들
여자의 곡소리는 노래와 같고
사내의 옷차림은 사치스럽네.
호협(豪俠)한 성미에
연(燕)나라 조(趙)나라의 기미를 띠고
풍속이 괴이하여
서울과도 다르다네.
이 시의 주석을 보자.
“반인은 원래 송도(開城)에서 이사해 온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말씨와 곡성은
송도 사람들과 같다. 남자들의 의복은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예사 사람과 다르다.
기절을 숭상하고 협기(俠氣)가 있어,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왕왕 싸움이 일어나면, 칼로 가슴을 긋고 허벅지를 찌른다. 풍습이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반인들의 말씨와 곡소리가 개성 사람의 곡소리와 같다는 것은 그들이 개성 출신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서울과 다른 말씨는 이들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이옥은 ‘방언’이란 글에서 반촌인의 말을 이렇게 구별짓고 있다.
“한성(서울)은 나라의 한복판이고, 한성의 한복판에 주민들이 있다. 그 소리치고 대답하고
울고 말하는 것이나 만 가지 물건들에 붙이는 이름이 여느 백성들과 달라,
그들을 구별하여 ‘반민( ?民, 泮民과 같음)이라고 한다.”
특이하지 않은가? 음조가 다를 뿐 아니라 사물의 이름도 일반 백성들과는 구분되었다고 하니,
일종의 특수한 방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핵심지역이라 할 성균관 일대가
마치 섬처럼 고립된 언어지역이었던 것이다.
특수방언 사용한 반인
또한 남자들이 사치스러운 복색과 호협한 기질, 폭력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여러 문헌이
증언하고 있다. 이 폭력성을 순화시키기 위한 움직임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서명응이 전기를 쓴 안광수(安光洙, 1710~65)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안광수 역시 반촌 사람이다. 다만 안광수가 순수한 반인(泮人)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안향과 같은 성씨인 순흥(順興) 안씨라는 것, 그리고 서명응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무반직(武班職)을 가졌고(정3품 절충장군이었다. 물론 이것은 보잘것없는 무반의 품계다),
또 그의 선조가 반촌에 흘러들어와 살았다(寄居)고 했으니, 원래 반촌의 토박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그의 행적을 보면 글깨나 읽은 지식인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광수는 “태학은 수선지지(首善之地)인데, 풍속이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라면서 자제들 중
똑똑한 사람 70여 명을 불러모아 제업문회(齊業文會)란 이름의 계를 만들었다. 말이 계지 이것은 학교였다.
그 학생들의 능력에 맞추어 경사자전(經史子傳)을 가르치고, 사친(事親) 경장(敬長)의 도리를 일깨웠다.
이뿐이랴. 관혼상제도 몰라서는 안 된다. 그는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그것을 가르쳤다.
안광수는 유능한 교육자였다. 그는 여유를 갖고 살아야 기상이 좁아지지 않는다면서 맑은 날,
경치 좋은 곳을 골라 학생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또 상을 당하자 소식(疏食)으로 삼년을 지내고, 주야의 곡읍을 비록 병이 심하게 나도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고 하니, 그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해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에 반촌의 자제들이 감화되어 그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안광수의 제자들은 성균관의 서리가 되고 수복이 되었던 바, 그들은 모두 성균관의 업무에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었던 것이다. 안광수가 죽자 반촌 사람들은 그의 제자건 아니건 남자건 여자건
애통해하면서 그의 장례를 도왔다. 또 제자들은 그를 기념하여 기일 생일 사시의 절기마다
제수를 마련해 제사를 도왔다고 한다.
나는 안광수란 인물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유가(儒家)의 예에서 벗어나 있던 부류들의 독특한 성격이 유가의 예에 감염되는 것을 보면
되레 서글픔을 느낀다. 하지만 ‘안광수전’은 원래 반인의 독특한 성격을 반증하는 구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안광수전’을 통해 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통제할 수 없었던
인간의 원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 성균관 몰락과 함께 사라진 반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대적 교육제도가 시행되자 성균관은 옛날의 위상을 잃고 중세의 유물이 되었다.
성균관이 무너지자 반촌도 따라서 해체되었다. 신분제의 붕괴와 함께 반촌 사람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차별 역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1920년대 신문기사에 의하면, 반인들은 여전히 소의 도살과
쇠고기 판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과 싸우기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1910년 보통학교 과정의 사립 숭정학교를 세워 반촌의 아동들을 가르쳤다.
특기할 것은 이 학교는 재정이 전혀 곤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차별을 생각해 쇠고기 판매 금액의 일부를 내놓아 학교의 재정을 충당했으니, 지방에 이사해 살더라도
숭정학교를 위한 헌금은 우편으로 부칠 정도로 열성이었다는 것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이 시대에 반촌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왜 의미가 없을까.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돈과 권력, 학벌, 출신지로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여전하다. 돈과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라 사는 곳 역시
경계가 지어져 있다. 서울 시내에는 지금도 반촌과 같은 게토가 존재한다.
이상한 일이다. 쇠고기는 모두 먹기 좋아하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인도에서도 소를 잡는 사람은
모두 천한 사람이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으니 농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람인데도
농민의 사회적 지위는 왜 늘 낮은가. 이뿐이랴.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왕과 양반처럼 고귀한
사람들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큰 사고를 낸 사람이어야 한다.
홍경래처럼, 임꺽정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까?
불과 몇 십년을 지나지 않아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될 것이다.
반촌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사람이다.
게토(ghetto) 속에 살던 이들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반촌 사람들에 관한 자료를 챙기면서 영웅의 열전이 아니라,
그런 잊혀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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