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대 효종
■ 사라진 북벌의 꿈
소현세자가 삼전도의치욕을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추어 조선을 바꾸는 것으로 승화시키려 한
인물이라면, 동생 효종은 그 치욕을 북벌로 씻으려 한 인물이다. 효종은 문치의 나라 조선에서
무치를 하려 한 특이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무치는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발을 낳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효종은 송시열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북벌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독살설에 휘말린 임금들이 대개 그렇듯이 효종의 죽음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었다. 효종은 죽기 두 달전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강력한 어조로 북벌을 주장하며 최소한 10년은살 자신이 있다고 호언했다.
그때 만 40세의 장년이었던 효종은 두 달 후 허무하게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효종의 증세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혹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효종실록>에 처음 병세가 기록된 날은 재위 10년 4월 27일이다.
머리 위에 난 작은 종기의 독이 점점 퍼져 얼굴까지 번졌는데, 당시 이런 증세는 그리 심한 것이 아니었다.
의원이 문안했을 때 효종이 한 말이 이를 말해준다.
"종기의 증후가 날로 심해가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의원들은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는데
경들은 그렇게 여기지 말라."
효종의 증세는 이렇듯 어의들이 심상히 여길 정도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종기를 진단한 어의의
처방은 산침이었는데, 이를 통해 독기를 배설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효종은 계속 산침을 맞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문제의 어의 신가귀이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었던 신가귀는 효종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궐문밖에 나아가 입궐을 청했다. 효종이 그를 입시시켜 물었다.
"침을 맞아야 하겠는가?"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농증을 이루려고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른 어의 유후성이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며 말리고 나섰다. 세자 (현종)가 일단
수라를 든 후에 침을 맞을지 여부를 논의하자고 중재에 나섰으나, 효종은 이를 물리치고 침을 놓으라고 명했다.
신가귀가 침을 놓은 후 침 구멍으로 피가 나오자 안도한 효종이 말했다.
"가귀가 아니었으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
그러나 침 구멍으로 피가 나온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솟구친 것이다.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문제는 침을 놓은 신가귀가 손이 떨리는 증세,
즉 수전증 상태였다는 점이다. 수전증의 의원이 국왕에게 침을 놓은 것은 조선조 초유의 일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전증의 어의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가 그치지 않자 약방에서 급히 청심환과 독삼탕을 올렸다.
정신이 혼미해진 효종이 삼공과 송시열, 송준길, 그리고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달려가 어상 아래 부복했을 때 효종은 이미 승하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손 한 번 못 써보고
북벌군주 효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허무한 노릇이다.
■ 소현세자의 유산
장남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왕좌를 지키고자 했던 인조도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인조는 소현세자 사후 4년 만인 1649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정변과 호란
그리고 음모와 독살로 점철된 27년 간의 재위 기간을 마감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바로 효종,
즉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다. 그러나 인조의 뒤를 이은 조선의 17대 국왕 자리는 원래
봉림대군의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것이자 원손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도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자로 결정된 이틀 후 상소를 올려 사양한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한 부담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상소는 "세자의 자리는 천만 뜻밖이며 원손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므로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지극히 간략한 내용이었다. 정승 등 고위직에 제수되면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는 당시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봉림대군의 이 상소는 의례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날 이미 병조의 군사 50여 명이 봉림대군의 저택에 파견되어 호위를 시작했던 데서,
그의 세자 책봉은 기정사실었다.
봉림대군은 1차 상소 사흘 후인 인조 23년 윤 6월 7일 재차 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이번 상소에는
1차 상소에서 언급했던 원손에 대한 말조차 빠져 있었다. 2차 상소를 마지막으로 봉림대군의 사양
상소는 다시 없었다. 적어도 세 번의 사양 상소가 기본 예의였던 당시 관례로 봐서 봉림대군의
이런 거조는 세자 수락 성명이나 다름없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로 책봉된 이 조치에 만족했던 것이다.
심양 시절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자리를 가로채려 했다는 물증은 찾기 힘들다.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은 그의 정치 공작의 결과라기보다는 소현세자의 정치관이 친청적으로 변한데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 짙다. 물론 이런 결과를 계산하고 그가 반청적인 자세를 견지했을 수는 있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다. 소현세자가 유고일 경우 조선의 종법에 따른 후사는 원손 석철이란 점에서,
봉림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반청 자세를 견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의 종법은 국왕이라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봉림대군이 즉위하자 소현세자의 원손 석철은 금기가 되었다.
소현세자의 원손 석철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효종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사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석철을 비롯한 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 죽었을지라도 세자의 3남 석견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세자의 두 아들이 미성년으로 죽었으므로 소현세자의 후사는 3남 석견이 이어야 했다.
소현세자의 유산은 효종이 즉위했다 해서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많았다.
소현세자의 급서를 책임져야 함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의관 이형익의 처리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양사는 다시 이형익의 처형을 요청했다.
그러나 효종은 인조가 그랬던 것처럼 단호하게 반대했다.
"어찌 당사의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사형을 논하는가.
지금 만약 그를 죽인다면 산조의 뜻을 거스를 염려가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공신이자 효종 즉위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유산은 이형익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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