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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제14대 선조 - <4>
    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019. 2. 9. 15:31


    
    ■ 제14대 선조   
    
    ■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선조의 교서까지 거부한 세력에게 광해군의 즉위는 두려운  일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왕위를 두고 세자와 다투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었다. 선조와 인목왕후의 전위 교서를 거부한 유영경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인물을 임금으로 택한 신하와, 그로부터 배척받았던 임금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세자의 장인 유희분은 전한 최유원을 시켜 선조 사망 당일 세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하였다. 하지만 유영경이 세자의 당일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유영경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씩이나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유영경으로서는 목숨을 건 
    반대였지만 이미 대세는 세자 광해군에게 기울었다. 광해군은 이튿날 백관이 모여 천세를 
    부르는 가운데 즉위식을 거행하고 드디어 왕이 되었다.
    유영경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다음 달 유영경을 중도부처 시켰다가 
    같은 해 9월 유배지에서 사사했다. 영수 유영경의 몰락과 함께 소북도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광해군이 이처럼 소북을 처단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로써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 
    만약 임해군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처럼 현명하다면 골육상쟁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동생을 임금으로 둔 형은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의도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임해군은 명나라가 광해군의 책봉을 거부하는 상황에 희망을 걸었을지 모르지만, 명이 책봉을 
    거부한 것은 자국의 광종을 위해서지 임해군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자신을 절도로 유배 보내라는 대신들의 청을 거부하며 군사를 동원해 
    자택 연금을 시켰을 때 근신하고 있어야했다. 그러나 임해군은 부인 차림으로 변장해 
    다른 사람에게 업혀 도망가다가 발각됨으로써 스스로를 궁지로 몰았다. 신료들의 거듭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보내고 말았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그 다음해 수장 이정표가 독을 들고 찾아갔으나 임해군이 
    독약 마시기를 거부해 이정표가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임해군의 비참한 죽음은 권력은 형제 사이에도 나눌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위야 
    어찌 됐것 이 사건은  광해군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에게 임해군 이상의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영창대군은 어엿한 선왕의 적자였으며 그의 생모 인목왕후는 엄연한 대비였다.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지지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영창대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김제남은 영창대군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북정권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서 사태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광해군 5년에 발생한 박응서의 옥사는 김제남을 물론 영창대군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 사건은 
    전 서인 정승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가 주범이라 해서 '박응서의 옥사'라 불린다. 박응서는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등 7명의 서자들과 사생계를 조직하고, 소양강 위에 같이 살면서 스스로를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현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재를 지나던 은상을 
    살해했다가 포도청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이 발각되었다. 서인측 기록인 <광해군 일기>에는 대북 
    영수 이이첨이 이 사건을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반역 사건으로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영창대군  추대 사건으로 인정되어, 
    배후 인물인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김제남이 사사된 
    다음해인 광해군 6년 강화부사 정항은 음식물 공급을 중단하는 등 영창대군을 핍박하다가, 
    방에 가두고 심하게 불을 때 비참하게 죽였다고 한다. 더구나 김제남의 세 아들이 모두 화를 입는 등 
    인목대비 집안은 사실상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건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것으로 끝날 수 없었다. 김제남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만일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영창대군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 목숨은 부지시켜주는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면 서인들의 
    쿠데타 명분은 궁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미 그 친아버지와 친아들을 죽여 버린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더 이상 인목왕후를 대비로 모실 수 없었다. 두 지친을 죽여 버림으로써 형식적인 
    아들과 형식적인 어머니로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지마저  없애버린 이 사건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큰 실책이었다. 
    이들은 3년 후에 드디어 폐모론을 주창하였다. 광해군 9년부터 주창되기 시작한 폐모론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여버린 대북정권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성리학 사회 조선에서 '모자관계'는 권력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하수였다. 
    제 아무리 현세의 권력이 강고해도 아들이 어머니를 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폐모론은 
    내외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심지어 평생 당색이 없었던 이항복마저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 가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랄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신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라고 원한을 가질 정도로, 어머니를  폐한다는 비윤리적 행위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을 고립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던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드디어 광해군 10년 인목대비를 폐하고 
    존호를 깍아 서궁으로 칭하면서 유폐시켰다. 비록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생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어머니를 폐한 사태는 
    반대파에게 이런 모든 업적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아들이 어머니를 폐한 사태는 
    처음이었고, 일반 사가에서 이런 일을 했다면 당연히 사형이었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에서 
    완전히 멀어진 서인들은 폐모론을 명분삼아 세력을 모았다. 그리고 드디어 광해군 15년 3월, 
    서인들이 광해군의 조카뻘인 능양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 문제의 찹쌀밥
    
    선조는 죽기 직전 인목왕후를 통해 유서를 세자 광해군에게 전했다. 
    "형제를 내가 있을 때처럼 사랑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모름지기 내 뜻을 받아라."
    선조는 어린 영창대군의 보호를 맡길 인물은 세자 광해군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으로 하여금 영창대군의 존재를 두려워하게 만든 인물은 다름 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선조는 끝없이 병을 달고 다녔으면서도 약간의 기력만 있으면 세자를 흔들었다. 
    또한 신하로서 임금의 전위 교서 받기를 거부한 유영경 대신, 그를 탄핵한 정인홍을 
    귀양 보낸 인물도 선조 자신이었다. 따라서 선조가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급서하다보니 독살의 의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유력한 물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남계집>의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광해군이 폐출된 뒤의 기록이다. 광해군 측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에 선조 독살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편찬한
    <광해군일기>에도 선조 독살설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시사적이다. 다만<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해 서인측이 유일한 근거로 삼은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바로 이 찹쌀밥을 세자가 들였다는 것이 서인들의 주장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광해군을 쫓아낸 당사자 인조의 찹쌀밥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선조께서 위독하실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선왕께서 병 후에 맛있는 음식이 생각날 즈음 동구의 약밥이 마침 왔기에 과하게 잡수시고 
    기가 막혀 이내 돌아갔을 뿐 중간에 어떤 농간이 있었다는 말은 실로 밝히기 어렵다."
    선조의 기를 막히게 한 약밥, 즉 찹쌀밥을 들인 인물이 광해군인 것은 맞지만 
    찹쌀밥에 독이 들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을 입증하는 인물로 개시라는 궁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말로 '개똥이'라는 뜻의 이름를 가진 개시가, 세자를 교체하려는 선조의 뜻을 알고 
    광해군과 몰래 접촉해 뒷날을 도모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개시가 선조를 독살했는데 실상 광해군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고 있다.
    선조 때부터의 궁녀였던 개시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 이이첨과 한편이 되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은 물론이고,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광해군을 모시려면 
    개시의 허락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광해군과 동침하고자 하는 궁녀는 그녀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에게도 마음에 안 들면, "나의 큰 덕을 감히 잊는단 말이오. 
    내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임금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오"라고 성를 내니 
    광해군이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서인 측에서 과장한 소문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개시가 정몽필이란 자를 
    사랑해서 음란한 짓을 하면서 광해군의 후궁인 소의 윤씨를 중매해 음행하게 
    했다는 데 이르면 그 신빙성은 더욱 떨어진다.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후에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미약하다. 반정 일등공신 원두표는 집권 후 광해군이 선조를 시역했다고 
    상소하려다 그만둔  적이 있었다. 이때 왜 상소를 그만두었냐는 
    박세채의 질문에 대한 원두표의 대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 장유가 지은 왕대비(인목대비)의 교서 외에 언문으로 된 교서에는 
    광해의 작은 죄상도 다 주워 모았는데 다만 약밥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없었소, 
    이를 가지고 봐도 경솔히 들추기는 어려워서 그만둔 것이오."
    즉 서인들이 아무리 물증을 찾으려 해도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상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미약한 근거라도 있었다면 이는 인조반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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