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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제14대 선조 -<2>
    역사이야기/누가 왕을 죽였는가 2019. 2. 5. 16:25


    
    ■ 제14대 선조   
    
    ■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방계 승통에 있었다. 왕위에는 올랐으나 선왕 명종이 직접 
    전교를 내린 것도 아니었으니 다른 종친이 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인순왕후와 영의정 이준경, 그리고 우의정이자 인순왕후의 아버지인 심통원이 다른 종친을 
    선택했다면 선조는 즉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즉위 당시 선조는 가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재위 2년 12월에 박응순의 딸을 간택해 
    국혼을 치렀다. 그녀가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이다. 그러나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방계 승통이라는 
    콤플렉스를 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비 소생의 원자에게 후사를 넘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선조는 여섯 명위 후궁에게서만 왕자 열세 명과 옹주 열 명을 낳았는데, 이 열세 명의 아들 중에서 
    누가 선조의 뒤를 잇느냐 하는 문제가 민감한 정국 현안이 되었다. 
    이 많은 왕자들의 어머니가 각각 달랐으므로 문제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아들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아들 신성군은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이외에도 순빈 김씨 소생의 순화군과 정빈 민씨 
    소생의 인성군 등 수많은 왕자들이 각축하고 있었다. 이럴 경우 누가 대신들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점은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는데, 세자 책봉 이전에 대신들의 중망을 받은 왕자는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었다. 맏아들 임해군은 성격이 과격해서 대신들이 꺼려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 세자 책봉 문제는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재위 24년이 되도록 
    세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걱정한 우의정 유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가 논의했다. 
    이들이 마음에 둔 왕자는 둘째 광해군이었다.
    "우리가 국가의 중책을 맡았으니 마땅히 큰일을 해야 할 것이오. 지금 후궁 소생의 왕자가 
    많이 있는데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세자를 세울 계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오. 
    우리가 힘써 청해봅시다."
    "영상이 우리말을 듣겠소?"
    당시 영의정은 북인 이산해였고 유성룡은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영의정과 같은 당인 유성룡이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하자고 하면 영상이 어찌 듣지 않겠소."
    이렇게 하여 영의정 이산해를 포함하여 세자를 세우는 데 동의한 세 정승은 대궐에서 모여 
    주청하기로 했으나, 막상 약속 장소에 이산해가 나오지 않아 무산되었다. 다시 약속 날짜를 잡아 
    아렸으나 이번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산해는 당시 선조가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 아들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것을 알고, 
    광해군에게 뜻이 있는 두 정승과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선조 사이에 공백을 이용해 두 정승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했다. 이산해는 극적인 반전을 노리는 계획을 짰다. 인빈 김씨의 오라비 
    김공량과 주연을 나누기로 약속한 이산해는 먼저 아들 이경전을 김공량의 집으로 보냈다. 
    한참 후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이산해의 종이 급히 달려와 이경전에게 고했다. 
    "대감께서 오시려고 하다가 어떤 말을 듣더니 문을 닫고서 눈물만 흘리고 계십니다"
    이경전이 놀라서 집으로 갔다가 곧 돌아와 김공량에게 설명했다.
    "부친께서 '좌상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말을
     들으신 까닭에 어찌 할 줄 모르고 계십니다."
    김공량은 즉시 인빈 김씨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고했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무슨 까닭으로 좌상 정철이 너희 모자를 죽이려 한다더냐?"
    "먼저 세자 세우기를 청한 뒤에 죽이려 한답니다.'
    선조는 일축했다. 
    "뜬소문이지 정철이 그럴 리 있나."
    그 다음날 세 정승이 함께 세자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는데 이산해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서 유성룡과 정철만 선조를 청대하였다. 정철이 세자책봉 문제임을 말하자 
    선조는 "누가 적당한가"라고 물었다.
    "광해군이 그 중 가장 중망이 있습니다."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의 작호가 나오자 선조가 화를 벌컥 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경은 무슨 말을 하는가?"
    유성룡은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고 정철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물러나왔다. 
    이 사건은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정철을 거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산해의 계략이 성공한  것이다. 양사에서 즉각 탄핵에 들어갔다. 
    "영돈녕 정철은 조저의 기강을 마음대로 하여 그 위헤가 세상을 뒤덮었으니 파직시키소서."
    구체적인 혐의도 없이 대신을 탄핵하면 대간이 추궁을 받은 법인데도, 
    "위세가 세상을 덮었다"는 모호한 혐의를 선조가 받아들임에 따라 
    정철은 머나먼 강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처럼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조정이 한바탕 소동을 겪은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정확하게 개국 2백년 만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모든 체제를 송두리째 뒤엎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했던 황윤길의 보고는, 
    "침략의 조짐이 없다"는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묻혀버렸다. 황윤길을 야당인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집권당인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서인만을 골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공격한다는 기본적인 안조법칙마저 당리당략에 묻혀버린 것이다. 적군이 침입할 
    가능성이 1퍼센트만 있어도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하는 것이 국방의 기본 원칙이란 점에서, 
    당시 조선은 이미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을 전사시킨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해 오자, 놀란 선조는 신립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삼도순변사로 제숫했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보검과 전권을 하사받은 신립은 
    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자는 장수들의 요청을 무시한 채 허허벌판인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대패하고 충주는 왜적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상대당을 거꾸러뜨릴 게략을 세우느라 정신 없던 조정 신료들은, 막상 거꾸러뜨려야 할 왜군이 
    쳐들어오자 도망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선조도 마찬가지 였다. 선조는 군부로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자세보다는 일신을 보존하는 일에만 골몰해, 
    왜적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기로 했다.
    사실 조정은 선조가 도망가기 전부터 이미 조정이 아니었다. 아직은 어엿한 국왕인 선조가 
    젊은 내시들과 판방에 앉아 있는데도, 백성들이 대궐로 난입해 값나가는 물건들을 마음대로 들고 갔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제지할 생각을 못했다. 또한 도망가는 선조의 행렬이 돈의문을 지날 때는 
    평소 '군신의 의리'를 밥 먹듯이 읊조리던 배관들이 모두 도망가 따르는 자가 1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대궐에 난입해 노비들을 관리하던 관청인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대궐은 양반 사대부의 침학에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불타고 만 것이다. 선조의 행차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백성들이 어가를 가로막고 선조를 비난했다. 
    "상감은 그 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들 부자 만들기에만 열중하고 후궁의 오라비 
    김공량 사랑하는 것만 제일의 계책으로 여기다가 오늘 이 일을 당했는데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으시오."
    그 중에는 선조에게 돌을 던진 사람도 있었으니 백성들에게 선조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대부가 농민을 지배하던 조선의 국가 체제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광해군은 이처럼 국가체제가 붕괴된 폐허상태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다"며 정철을 치죄하던 선조는 세자를 세워야 인심이 안정될 
    것이라는 조정의 중의에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으로서는 나라가 
    오늘  망할지 내일 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니, 
    앞으로 임금이 될지 왜적의 손에 죽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어렵사리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리는 고난이었다.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의 임무를 맡은 광해군은, 맹산, 곡산, 이천 등지를 순회하며 
    왜군을 교란시키고 백성들을 의무했다. 선조도 광해군의 이런 활약에 고무되어 
    개평역에 있던 광해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살아서는 망국의 임금이요, 죽어서는 이역의 귀신이 될 것이다. 
    부자가 서로 헤어졌으나 다시 볼 날이 없을 듯하다. 오직 바라는 바는 
    세자가 옛 판도를 다시 회복하여 위로는 조종의 영을 위로하고, 
    아래로 부모의 돌아옴을 맞이하라.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노라."
    광해군은 이 편지를 읽고 목놓아 통곡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돌을 맞는 
    수모를 당한 선조는, 해전에서 이순신의 활약과 육전에서 의병과 명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한 고비 넘기자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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