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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십팔사략 (十八史略)중국의 고전 /역사와 정치 2019. 1. 25. 13:03
110. 십팔사략 (十八史略) / 저작자 증선지(曾先之)
137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고대부터 송나라 때까지의 역대 왕조에 관한 흥망을 그린 역사 독본이다. 『사기』, 『한서』, 『삼국지』 등 17정사(正史)에 송나라 때의 사료를 넣어 18사로 하고,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그 내용을 편년체로 요약했다. 수천 년 중국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초학자들이 읽기 쉽게 편찬했다. 전 2권.
저자 증선지는 송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의 사람으로, 자는 종야(從野)이며, 강서 노릉(盧陵) 출신이다. 그의 행적은 송나라 때 진사에 합격한 뒤 지방관을 역임했고, 송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는 출사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 무렵 강남 사대부들은 대체로 이민족 왕조였던 원나라의 관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은밀히 저항하면서 재야 문인으로서 민족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 했는데, 아마 증선지도 이런 강남사대부의 한 사람으로 평생 제자의 교육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십팔사략』은 그 명칭대로 18종의 사서를 요약한 것이다. 과거가 행해지던 시대에는 사서(四書)에서 시작해 오경과 시문, 사서(史書)의 순으로 공부를 했는데, 이민족이 지배하던 무렵에는 유교 경전보다도 역사서가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우는 좋은 자료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정사는 양이 방대하고 복잡해 초학자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이 책이 편찬되었던 것이다.
편집 방침을 보면, 왕조사관으로 일관해 역대 왕통을 철저히 더듬고 있는데, 이것은 그 무렵의 민족의식으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읽는 자에게 좀더 깊이 알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도록 배려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명한 고사나 명언도 많이 실려 있다.
■ 진나라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진시황 34년에 승상 이사(李斯)1) 가 상소를 올렸다.
“예전에 제후가 할거해 싸울 때, 서로 다투어 학자들을 초빙해 후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하가 통일되고 법령도 정비되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안정 속에서 농업과 공업에 힘을 써야 하고, 사회의 지도층은 법령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지금도 이 새로운 체제에 반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표본으로 삼지 않고, ‘과거’를 들어 오늘을 비판하면서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법령이 발령될 때마다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속으로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나가 공공연히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비방과 중상을 해 대는 무뢰배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진 제국 외의 역사 기록 따위는 모두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또한 박사의 관직에 있는 자가 소유하는 책을 제외하고, 『시경』, 『서경』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저작을 개인이 소유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 책들은 모두 군수에게 제출케 하여 소각해야 할 것입니다. 『시경』, 『서경』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시장에서 목을 쳐야 하고, ‘옛날’을 들어 ‘오늘’을 비판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해야 합니다. 다만 책 가운데서도 의약과 점, 농사에 관련된 것은 남겨 두어야 할 것이며, 법령을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관리가 가르쳐 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시황제는 그 상소를 받아들였다.
진시황 35년,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은 “황제가 나쁘니 선약(仙藥)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쳤다.
그것을 계기로 학자들에 대한 시황제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렇게 후대해 주었는데도 나를 배신하다니! 하물며 나에게 욕을 해? 그 학자라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쓸데없는 말로 백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함양(咸陽, 진나라의 수도)의 학자들을 모두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검찰관에게 명해 학자들을 총점검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서로 손가락질하고 비판만 할 뿐 아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시황제는 464명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들을 모두 함양에서 생매장해 죽였다.
1) 이사(李斯, -BC 208) 이통고(李通古),
전국 시대 초나라 출신의 사상가이자 진나라의 승상. 진시황제를 보좌하여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여했고, 통일 후에는 군현제 등을 실시하여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도량형, 화폐, 문자 통일 등 중앙집권책을 폈으나, 한편으로 분서갱유 사건 등을 주도하여 진시황제가 악명을 떨치는 데 기여했다.
■ 곡학아세(曲學阿世) - 학문을 비틀어 세상에 아첨하다
한나라의 무제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하지 않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성인의 가르침에 정통한 사람을 초빙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을 상경시킬 때는 연도(沿道)의 군(郡) 당국이 차례대로 숙식을 제공하게 하고, 또한 그 상경 시기를 그 군의 회계책임자가 연차 보고를 하기 위해 상경할 때에 맞추어 여비가 들지 않게 배려했다.
이렇게 하여 치천군(菑川郡)에서는 공손홍(公孫弘)2) 이 선발되었다. 공손홍은 무제의 질문에 대답했다.
“군주가 하늘의 법칙에 따라 화덕(和德)을 갖추면, 아랫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백성이 화합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조화가 달성되면 기도 온화해지고, 기가 온화해지면 형태에도 온화함이 나타나며, 형태가 온화해지면 목소리에도 온화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 호응해 천지 만물이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무제는 그 답변을 일등으로 치고 그를 궁중의 금마문(金馬門)으로 불러 정식으로 등용하는 칙서를 내렸다.
그즈음 제나라 출신의 원고(轅固)가 90여 세의 나이로 현량과에 합격해 조정으로 초빙되었다. 원고와 공손홍은 동료였으나, 두 사람이 조정에서 마주치면 공손홍은 늘 눈길을 피해 버렸다. 어느 날, 원고는 공손홍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공손 님, 올바른 학문을 익히고 나서 말을 하는 게 좋소. 학문을 비틀어서(曲學) 세상에 아첨(阿世)해서는 안 되오.”
2)공손 홍(公孫弘,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21년)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자는 계(季) 또는 차경(次卿)이며 치천국 설현(薛縣) 사람이다. 무제 치세에 내사, 어사대부, 승상을 역임했으며, 전한 최초로 작위 없이 승상에 올라 승상에게 작위를 내리는 관례의 시초가 됐다. 작위와 시호는 평진헌후(平津獻侯)다.
■ 조조는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조조는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빠르고 권모술수에 능했다. 게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직업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즈음, 여남(汝南)에 허소(許劭)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의 사촌 형인 허정(許靖)과 함께 평판이 자자했다. 두 사람은 자주 향당(鄕黨)의 인물에 대해 비평을 가했다. 매월 초하루가 되면 이들의 인물 평가 순위가 정해지는데, 여남 사람들은 그것을 ‘월단평’이라 했다.
어느 날 조조가 허소를 찾아가 물었다.
“저는 어떤 인간입니까?”
허소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조조는 빨리 대답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허소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자네는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姦雄)이 될 걸세.”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뒷날 조조는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하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 거병했다.
■ 입의 말은 달지만, 배 속의 칼은 무섭다
당나라의 재상 이임보(李林甫)는 현종의 측근들에게 열심히 아부하고, 현종에게는 늘 눈에 들게 잘 보여서 총애를 받았다. 그런 한편으로 군신의 의견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획책해 현종의 귀와 눈을 막아 버렸다. 어느 날 그는 많은 어사(御史)들 앞에서 이렇게 겁을 주었다.
“천자의 의장(儀仗)에 쓰는 말을 잘 봐라. 가만있으면 아무 일도 없지만, 조금이라도 울음소리를 내면 그냥 끌려 나가고 말지 않느냐.”
그는 그런 식으로 어진 신하들을 미워하고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을 배척했다. 너무도 음험한 그의 성격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꿀처럼 달지만, 뱃속에 든 칼은 정말 무섭구나[구밀복검(口蜜腹劍)].”
그가 밤중에 언월당(偃月堂)이라는 집에 틀어박혀 생각에 잠기면, 그다음 날 반드시 누군가가 죽었다. 이러한 인물이 19년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기에 훗날 대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지만, 현종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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