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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정조 즉위 초기의 정국(政局)과 「홍국영 전성시대」 - II
    역사이야기/사색당파의 이해 2019. 5. 9. 17:56


      
      ■ 「홍국영 전성시대」- 2 
      
      ‘앓던 이’ 홍인한이 조정에서 쏙 빠지자 대리청정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조는 1776년 1월 27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그 3일 뒤인 1월 30일 대리청정 
      의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 3개월 뒤 영조는 사망하였다.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에 세손이 왕위를 승계하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을 깨끗이 
      제거해주고 그렇게 떠나갔던 것이다. 미상불, 그즈음 세손은 노론 대신들의 파상공세에 
      내내 시달려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신의손’ 영조의 ‘철벽블로킹’으로 숱한 위기들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였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세손에게마저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명선의 상소 이후 소싯적부터의 ‘라이벌’ 정의겸이 심상운이라는 자로 하여금 
      서명선의 상소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사주하여 조정이 또 한 번 불난 호떡집이 되긴 
      하였지만, 대세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 이야긴 이쯤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한 부사직이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 한 장이 정국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뒤바꿔 놓았고, ‘개혁군주’ 정조의 시대는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개막의 팡파레를 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직후 정조는 대신들 앞에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대신들은 경악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도자의 
      취임 일성은 새 정권의 국정운용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정은 아직 그 아버지를 제거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세력은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
      (罪人之子 不爲君王)’는 논리로 정조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은 무리였다. 
      때문에 정조가 임금으로 즉위한 것은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였던 것이다. 
      한데 그런 임금이 스스로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나섰으니 
      다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여 그가 초장부터 숙종처럼 ‘환국’를 통해 조정을 바둑판 뒤엎듯이 발칵 뒤집어 
      놓았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워낙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뒤끝이었거니와 당시 조정은 
      여전히 노론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미상불 섣불리 판엎기를 시도할 상황도 아니었다. 
      실제로 즉위년 8월 영남유생 이응원이 '영조 38년에 사대부도 아닌 일개 중인 나경언이 
      임금에게 상변서를 올린 것은 노론의 음모에 기인하는 것'이라며 관련자들의 척결을 
      요구하자, 이는 '어리석은 짓 아니면 미치광이 짓'이라며 
      오히려 이응원 부자를 '대역부도'로 처벌하기까지 하였다. 
      정조에게 있어서 아버지 문제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방정식' 혹은 '뜨거운 감자'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아버지를 따르자니 할아버지가 울고, 할아버지를 따르자니 
      아버지가 우는, 그야말로 진퇴양란의 입장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즉위 초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하고 사당을 '경모궁'으로 높이는 숭모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시범케이스'로 자신을 축출하려 하였거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에 대하여는 역모죄 등을 적용하여 응분의 책임을 물었다. 
      이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여, 세자시절 사사건건 맞섰던 ‘이반투위’의 투톱 홍인한과 정후겸을 여산과 경원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하고 화완옹주를 사가로 내쫓았으며, 문 숙의의 착호를 삭탈하고 
      그 오라비 문성국을 사사하는 한편 그의 어미는 제주도로 보내 노비로 만들어버렸다. 
      대비인 정순왕후에 대하여는 직접 공격을 자제하였지만 2인자 홍국영을 앞세워 그 오빠 
      김귀주 일파를 모조리 숙청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척신들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정치판에 
      끼어든 환관들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다만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치죄를 요구하는 
      내외의 여론이 빗발쳤음에도 혜경궁 홍씨가 단식까지 하면서 극렬하게 반대하여 
      처벌에 어려움이 있었다. 
      영조 38년 사도세자를 죽인 후 극도로 비대해졌던 외척세력이 이런 정조의 배척으로 
      즉위 반년 만에 일단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외척은 발본색원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었다. 여전히 궁중 깊숙한 곳에 ‘정순왕후’와 ‘혜경궁’이라는 외척의 
      뿌리는 건재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다. 
      또한 정조의 이 같은 조치는 그와 반대편에 서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아연 긴장케 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고 정조가 세손이었던 시절 그를 핍박하였던 이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로서는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결국 정조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1년에 있었던 3건의 반역사건이 그것이다. 
      이 3건의 반역사건은 공교롭게도 모두 홍계희의 가문에서 주도하였다. 홍계희는, 
      주지하다시피 ‘나경언의 상소 사건’을 배후조종한 인물이었다. 홍계희는 1771년 이미 
      사망하였지만 그 가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누구보다 불안하게 
      여기는 형편이었다. 이에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은 궁중에 암살단을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1777년(정조 즉위년) 7월 28일, 홍상범에게 포섭된 천민 출신 장사 전흥문과 궁궐 호위군관 
      강용휘를 선발대로 한 20여명의 암살단이 궁궐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궁중별감 강계창과 
      나인 월혜의 길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 없이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존현각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하나씩 들어내는 순간, 때마침 독서 
      중이던 정조 - 그즈음 그는 신변에 대한 위협 때문에 밤에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 가 
      수상한 기척을 감지하고 호위내관들을 긴급 호출함으로써 암살단은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정조에 대한 이들의 암살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주범 홍상범과 홍대섭, 유배지에서 
      이를 배후조종한 홍상범의 아버지 홍술해․홍지해 형제, 그리고 홍상범의 4촌 승지 홍상간 
      등을 숙청시키면서 사건수사는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것이 끝은 아니었다. 
      궁궐 난입사건에 대한 수사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배당한 홍술해의 처(효임)가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을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효임의 의뢰를 받은 점방은 다섯 군데의 
      우물물을 받은 다음 홍술해 집과 홍국영 집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합하여 한 그릇을 
      만들고는 그 물을 홍술해의 우물에 부음으로써 홍국영의 기를 빼앗고자 하였다. 
      또한 붉은 모래로 정조와 홍국영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 화살을 꽂아 땅에 묻어버린 
      다음 홍국영의 집에 저주의 부적까지 만들어 붙였다. 이 저주사건 또한 얼마 뒤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검거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홍계희 가문의 모반사건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홍계희의 팔촌에 해당하는 홍계능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사실이 
      또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홍 씨 일문 등 주동자 23명이 처형되었고 
      은전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즉위 초에 있었던 3대 모반사건은 정조의 신변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전․현직 벼슬아치 뿐만 아니라 환관과 궁녀, 심지어는 임금을 보호하여야 할 
      호위군관까지 여기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에 최측근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국영은 숙위소에서 모든 정사를 결재하면서 
      정조의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홍국영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특권적 문벌가문 출신의 야심가 홍국영 - .정조 즉위를 극력 반대한 노론세력에 맞서 
      기민한 판단과 대담한 행동으로 세손의 기반을 굳히고 그를 결국 즉위에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이 홍국영이었다. 정조는 이런 홍국영을 즉위 3일만인 
      3월 13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앉혔다. 
      정조의 명령으로 간행된 '명의록'에 의하면, 이 조치는 정조를 보호한 '의리의 주인'
      으로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내려진 것이라 하였다.
      「정조실록」에 ‘특별히 발탁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매우 이례적인 발탁임에 틀림
      없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후 그는 국왕의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 
      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조정의 모든 실권은 
      홍국영에게 있었고, 홍국영을 통하지 않고서는 임금을 만날 기회조차 봉쇄당하였다. 
      마치 서슬 퍼렀던 유신시절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모두 
      끌어안고 있었던 것과 같은 권세였다고나 할까.
      정조시대 초기는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시대'였다. 그의 정치적 파워는 
      최규하 정권시절의 국보위원장 전두환을 능가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때 홍국영의 나이는 불과 서른살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렇듯 유례없는 
      수직상승의 벼락 출세가도를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었을까. 과거에 11등으로 
      급제하였다는 '그렇고 그런' 머리로 말이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가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그는 뼈대있는 '빵빵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는 선조임금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이었다. 정명공주는 광해군 때 비명에 간 영창대군의 
      친누나로 인목대비의 소생이었다. 홍주원의 가문은 왕실과 연혼관계를 맺으면서 
      오랫동안 서울을 근거로 뿌리를 내려온 대단한 문벌가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영조 대부터 권세를 누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홍국영에게 10촌 할아버지가 되었다. 
      정조와도 12촌 형제지간이었다. 요컨대 홍국영은 영조 재위 당시 영조․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등과 모두 인척관계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조가 홍국영을 특히 신임하여 
      수 년 동안 사관(史官)으로 옆에 두고 아주 귀여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홍국영이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예문관 사관(史官)과 세손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설서까지 겸하게 되었던 것은 우연이라거나 권모술수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든든한 가문 덕을 보았다 함이 보다 정확한 분석일 듯싶다. 
      다음으론, 시기적으로 적절한 때에 관직에 진출하였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좌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은 그가 출세가도를 질주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홍국영은 어느 날 위험에 빠진 정조를 구하고자 
      하늘 저편에서 홀연히 나타난 로봇태권V나 우주소년 아톰이 아니라 영조의 인사발령에 
      의하여 업무적으로 세손을 만나고 또 세손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면서 
      그의 환심까지 사게 된, 오늘날에도 - '가신' 혹은 '측근' 이라는 이름으로 -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출세의 길을 밟았을 뿐이었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정조와 나이도 비슷한데다 한번 궁에 들어오면 정조에게 세상의 모든 일을 
      꾸밈없이 전해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겨(마치 사내대장부가 첩에게 미혹 
      당한 것과 같으시어) 더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분석도 전해진다. 
      혜경궁 홍씨의 분석이다.
      아무튼, 홍국영은 조정을 쥐락펴락 하는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자신의 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조카’에게 왕위를 잇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례를 올린 지 1년이 채 못 되어 동생인 원빈 홍씨가 훌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홍국영에게 큰 충격이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꿈이 무산되자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혜경궁 홍씨는 ‘제 누이 홀연히 죽으매 국영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누이의 내전 나인 여럿을 잡아다 칼을 빼들고 무수히 치며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고 
      「한중록」에 기록해놓고 있다. 
      홍국영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청명당계열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핍박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조를 직접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당시 효의왕후는 비록 아이는 낳지 못했어도 후덕한 인품으로 인해 
      조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왕비였다. 홍국영은 이런 왕비를 물증도 없이 핍박하였고 
      이는 내외의 큰 발발을 불러오게 되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 역시 정조 즉위 
      뒤 가문이 몰락한 배후에는 홍국영이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홍국영이 왕비까지 압박하자 
      거세게 반발하였다. 
      홍국영은 어느덧 왕대비, 혜경궁, 왕비를 비롯한 궁궐 내 모든 세력의 '공적 1호'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그는 여동생(원빈) 살아있을 적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여동생의 양자로 삼는 등 왕위계승권에까지 개입하려 한 전례도 있었다. 
      정조는 비로소 냉철한 시각으로 홍국영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것 같았던 그의 모습에 야심이 철철 넘치는 
      한 사내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결국 홍국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한데 홍국영이 정조에게 먼저 떠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자신이 구설에 오른 것이 누이를 후궁으로 들인 데 기인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를 승낙하였다. 
      홍국영은 조만간 정조가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정조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에게서 야심가로서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정조는 
      끝내 그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고, 홍국영은 마음의 울분을 
      이기지 못한 채 떠돌다가 
      정조 5년(1781년) 강릉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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