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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초한지 卷一 / 4장 웅크린 호랑이(4)
    Warehouse/이문열 초한지 2019. 1. 1. 20:05

    그 시대는 산 사람을 보살피는 일[양생]보다 죽은 사람을 보내는 일[喪死]이 훨씬 무겁고 귀하게 여겨지던 때라, 장례에 관련된 일로 벌이를 삼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문객(喪門客)은 장례식에 가서 삯을 받고 울어주는 사람들을 말하며, 피리 부는 사람[吹簫人] 또한 상가에서 일삼아 장송곡을 연주하는 악단의 일부였다.


    항량은 먼저 상문객과 피리 부는 사람을 부르게 함으로써 장례의 겉모양부터 갖추게 했다. 하지만 장례의 실질은 죽은 이를 산 사람들로부터 떼어내는 일로, 그 과정에서 슬픔을 일정한 형식으로 나타내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였다. 항량은 상가(喪家)로 가는 도중에 다시 몇 군데 들러 자신이 부릴 사람들을 더 불러모았다.


    상가에 이르니 굴씨가(屈氏家)의 젊은 상주(喪主)는 경황없이 울고만 있었다. 나라 잃고 떠돌아다니는 왕족의 군색함과 고단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살림이었다. 집안은 몇 안 되는 노복(奴僕)과 가동(家싔)들만이 어찌할 바를 몰라 오락가락하다가 항량이 불러들인 한 떼의 상문객들이 몰려들어서야 비로소 상가답게 어우러졌다.


    이윽고 항량의 부름을 받은 오중의 자제들이 굴씨가로 몰려들었다. 항량은 그들을 맞아 평소에 알아둔 바 능력대로 일을 맡겼다. 셈에 빠르고 이재(理財)에 밝은 이에게는 장례에 쓰이는 금전의 출납을 맡겼고, 발이 넓고 물자의 흐름을 잘 살피는 이에게는 제기(祭器)와 장구(裝具)의 수급을 맡겼다. 또 상주의 친지와 연비(聯臂)를 많이 아는 이에게는 발이 빠른 젊은이를 붙여 되도록 널리 상을 알리게 했다.


    문상 오는 손님들도 항량의 조직과 배치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예만 표시하고 돌아가도 되는 문상객은 그냥 보내 주었지만 쓸모가 있으면 붙들어 두고,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였다. 상주를 대신하여 빈객을 맞아야할 사람이면 상주 곁에 두고, 잡일을 거들어야할 사람이면 각기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항량은 이전부터 누구든 상사(喪事)가 있어 부탁만 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일을 도맡았다. 살림이 넉넉하고 권세 있는 자가 죽으면, 상가 한가운데 진세(陣勢)라도 벌이듯 자리잡고 앉아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상주의 허영를 채워주었다. 또 보잘것없는 저잣거리 늙은이가 죽어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상주라도 울며 매달리면, 항량은 평소에 알아둔 자기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 누구에 못지않게 격식을 갖춘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어느 편이든 그렇게 상사를 도맡아 치르는 항량은 마치 대병(大兵)을 부리는 장수 같았다고 한다. <사기(史記)>는 그런 항량의 능력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오중의 요역(쟸役)과 상사가 있을 때마다 항량이 도맡아 일을 처리하였는데, 은밀히 병법(兵法)을 사용해서 손님과 젊은이들을 배치하고 지휘하였으며, 또 그로써 그들의 재능을 알아두었다.>


    요역을 도맡아 처리했다는 것은 아마도 군수인 은통과 오중(吳中) 사람들 사이에 부역을 두고 벌어질 수 있는 긴장관계를 조정하고 절충한 일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또 은밀히 병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꾸미고 사람을 부리는 재주가 뛰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로써 그들의 재능을 알아두었다’는 구절은 다른 뜻에서 눈길을 끈다. 곧 항량은 그때 이미 뒷날을 내다보고 나름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중 초나라 땅에서 봉기한 여러 갈래의 세력 중에서 초기의 조직과 배치가 가장 잘 된 것은 항량이 이끄는 세력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장례를 통해 알아둔 능력에 따라 사람들을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인(發靷) 날을 받고 산역(山役)에까지 채비가 미쳐서야 상가는 경황 중에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날은 어느 새 저문 뒤였다. 항량이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술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젊은 가동(家싔) 하나가 찾아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주인마님, 급히 돌아가 보셔야 하겠습니다. 작은 주인마님께서….”


    “우(羽)가? 우에게 무슨 일이 있단 말이냐?”


    자식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조카의 일이라 어지간한 항량도 놀라 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주인마님께서 나가시고 오래잖아 한 장사가 찾아와 작은 주인과 무예를 겨루었는데.....”


    “그래, 우리 우가 패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렇지는 않으나, 주먹과 손바닥을 맞대는 것에서 시작한 겨루기[比武]가 막대와 몽둥이를 지나 도검(刀劍)과 과극(戈戟)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피를 보고서야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날이 저물어 와도 겨루기를 그치기는커녕, 횃불을 마련해 사방을 밝히라는 작은 주인의 말씀에 걱정이 되어 이렇게 큰 주인마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장사는 누구라더냐?”


    “이름을 대기는 하였으나 낯설었습니다. 다만 환초(桓楚)의 수하(手下)라는 것 밖에는….”


    “환초의 수하?”


    항량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환초라면 오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수감으로 알려진 사나이였다. 힘이 세고 무예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제법 인망도 얻어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항량보다 더 큰 오중의 세력가였다.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너무 드러나 있다는 게 오히려 탈이었다.


    “오중에서 누가 진나라를 상대로 일을 낸다면 그것은 환초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댔고 진나라 관부(官府)는 그런 환초를 눈여겨 살피고 있었다.


    (정말 환초의 수하라면 서로 피를 보아서는 안된다!)


    항량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둘러 말에 올랐다. 언젠가는 서로 부닥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진나라를 상대로 하고 있는 한 서로 등져서는 안 될 세력이 환초의 패거리였다.


    저만치 저택이 보이는 곳에 이르니 수많은 횃불로 뒤뜰 하늘이 벌겋게 타오르듯 밝았다. 큰 야전(夜戰)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 병장기 부딪는 소리가 멀리까지 요란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해 집으로 돌아간 항량은 말에서 뛰어내리기 바쁘게 뒤뜰로 달려갔다.


    짐작대로 횃불로 훤한 뒤뜰 한가운데서 두 사람의 장사가 길고 무거운 무기를 맞대고 있었다. 항우의 방천극(方天戟)과 낯선 사내의 장창(長槍)이었다. 칼을 빼고 뛰어들어 먼저 싸움부터 말려놓고 보려던 항량은 그들의 병장기가 뿜어내는 무거운 기세에 흠칫했다. 하도 빈틈없는 막을 이루며 얽혀 있어 뛰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함부로 소리를 지르기도 두려웠다. 갑작스러운 고함이 한쪽의 기력을 흩어놓을 수도 있는데, 그게 조카인 항우가 된다면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엉거주춤 멈춰 선 항량은 한동안이나 다른 가동들처럼 싸움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구경하고 있는 항량의 얼굴에 차츰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미세하나마 조카의 우세가 느껴진 까닭이었다.


    (무엇 때문인가 저 아이가 한 수 접어주고 있다. 조금 전 그 한 초식도 한치만 더 내질렀으면 저자의 목을 꿰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적아(籍兒〓항우)는 오히려 방천극을 거둬들였다. 두고 볼 일이다….)


    그런 항량의 헤아림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울 시간도 가기 전에 갑자기 항우가 한소리 큰 외침과 함께 방천극을 내지르더니 그 자루를 봉(棒)처럼 휘둘러 상대의 오른팔을 쳤다. 상대가 가벼운 신음과 함께 창대를 놓쳤다.


    (처음부터 상대를 다치지 않고 이기려하다 보니 시간을 끌었구나. 무슨 뜻일까.)


    이제 항량은 느긋한 마음이 되어 조카가 하는 양을 살폈다. 무예에서는 한 수 뒤졌지만 인품만은 상대도 항우에 뒤지지 않았다. 비로소 사태를 알아차린 듯 두 손을 모았다.


    “병장기에는 눈이 없다는데, 이렇게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소이다. 내가 미련해 진작에 항형(項兄)의 고명한 솜씨를 알아보지 못한 듯하오. 오늘 이 용저(龍且), 한 수 크게 가르침을 받았소.”


    “과찬의 말씀이시오. 무예를 배운 이래 용형(龍兄)처럼 날카로운 적수를 만나본 적이 없소.”


    항우가 제법 그렇게 겸양을 했다. 그제야 항량이 나섰다.


    “장사 어디 다치신 곳은 없소?”


    “항형이 인정을 써 살 껍질을 조금 상했을 뿐이니 걱정 마십시오.”


    “다행이오. 그럼 안으로 들어갑시다. 우(羽)야 나는 먼저 들어가 자리를 마련할 테니 너는 손님을 모시고 뒤따라 들어오너라.”


    그리하여 잠시 뒤 항량의 저택에서는 조촐하나마 정감 어린 잔치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그 용저라는 장사 뒤에 있는 환초라는 인물 때문이었으나, 차츰 용저를 위한 잔치가 되었다.


    용저는 고향도 조상도 기억 못하는 떠돌이 무사였다.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나 무예가 빼어났고, 환초를 흠모하여 일찍부터 그 패거리와 어울렸다. 그러다가 항우의 힘과 무예가 뛰어나단 말을 듣고 겨뤄 보려 달려온 것인데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항우와는 동갑내기였다.


    항량은 용저를 통해 환초의 세력과 근래의 형편을 알아보았고, 더 깊게는 환초의 됨됨이와 그가 세력을 모아 이루고자 하는 바까지 캐물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용저의 마음을 산 조카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 아이가 성급하고 고집이 세다하여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사람을 알아보고 끌어들일 줄도 아는구나. 그렇다면 사람을 부릴 줄도 알 터이니 아버님의 장재(將材)는 오히려 이 아이가 물려받았다. 내가 미칠 바 아니다….)


    하지만 항량을 감탄시킨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용저가 잠자리에 들고 숙질(叔姪) 둘만 남자 항우가 무겁고도 신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끝엣 아버님[季父]. 칼은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을 뿐이니 오래 배울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저는 만인(萬人)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배웠으면 합니다.”


    “만인에 맞서 싸우다니? 그 무슨 말이냐?”


    항량은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여정(呂政〓시황제)의 세상은 머지않았습니다. 하지만 천하를 통일한 그 여세를 지우자면 어차피 한차례 큰 싸움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더는 둘러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던 항량이 진작부터 생각해온 일인 양 말했다.


    “네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이제부터 병법(兵法)을 익혀 보아라. 그게 만인을 대적하기에 보다 나은 방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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