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윙의 왕’ 베니 굿맨(Benny Goodman)은 1935년 대공황의 터널을 지나온
미국 사회를 들뜨게 한 ’스윙 열풍’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까지 흑인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던 재즈를
미국 주류 백인계층에까지 파급시키며 재즈의 대중화에 일익한다.
그의 음악은 비슷한 시기 인기를 얻었던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 밴드들보다
악보에 근거한 정확한 연주를 했지만 즉흥성에 있어서는 다소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청감(聽感)이 빼어났고,
열정과 즐거움이 가득한 재즈 연주곡들을 많이 남기며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윙 연주자로 남아있다.
1909년 5월 30일 미국 뉴욕에서 David Benjamin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10살 때부터 클라리넷 연주 레슨을 받기 시작,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25년,
학교를 자퇴하고 벤 폴락(Ben Pollack)밴드의 일원으로 일하게 된다.
1934년 가을, 빌리 홀리데이를 비롯한 수많은 재즈 뮤지션을 발굴해 낸
명 프로듀서 존 하몬드의 도움으로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며
’Ain’t cha glad?’ (잭 티가든 노래), ’Riffin’ the scotch’ (빌리 홀리데이 노래),
그리고 ’Ol’ pappy’ (밀드레드 바일리 노래)를 모두 톱 10 에 올려놓으며
그의 순조로운 출발을 예견했다.
1934년 6월 그의 첫 넘버원 곡 ’Moon glow’가 발표되었고,
이어서 나온 ’Take my word’와 ’Bugle call rag’ 역시 톱 10 에 오른다.
이듬해인 1935년 7월, 그의 밴드는 미국 투어를 시작했고, 8월 21일, L.A.소재
팔로마 무도장(Palroma Ballroom)장에서 열린 그의 공연은 대성공을 거둔다.
(이 날을 기점으로 ’스윙의 시대’가 열렸다고 재즈 학자들은 얘기한다.)
스윙의 인기를 증명하듯 앨범 판매 역시 늘어나
그가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6곡의 연주를 모두 톱 텐에 올렸고,
RCA에서 이적하여 내놓은 5곡의 싱글 역시 그 해 말까지
모두 톱 10을 기록하는 저력을 드려낸다.
바야흐로 ’스윙의 왕’으로 등극하는 순간.
1938년 1월 16일, 스윙 밴드로선 물론이며 대중 음악인으로선 처음으로
뉴욕 카네기 홀 무대에 서며 그의 인기는 정점에 다다랐다.
이전까지 바(Bar)나 무도장에서만 연주되던 재즈는 이로서 콘서트 장에서 듣는
’지적이고 고상한’ 음악으로 발전해가기 시작한다.
베니 굿맨의 인기는 상쾌한 멜로디와 신명나는 리듬이 감지되는
그의 탁월한 곡 해석력에서도 비롯됐지만,
그의 음악의 맛을 한층 우려낸 사이드 맨들의 공력이 있었기에
그의 음악은 한층 미국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특히, 당시까지 재즈에선 드문 백인 연주자였던 점은
그가 ’스타’로 떠오르는 동인이 되었다.
이후 모던 재즈시대의 시대가 도래한 1944년까지
그의 밴드는 꾸준히 히트 곡을 양산하며 전성을 구가한다.
1944년 그는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1986년 6월 13일 맨하탄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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