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선도를 지원하는 우윤 권시
윤선도가 반좌의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원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우윤 권시였다.
"지금 윤선도의 상소문을 보면 식은 땀이 등을 적시는 것을 모를 정도입니다.
송시열.송준길을 국가를 쇠망으로부터 부흥시키고 난리를 평정할 수 있는 재목으로서
선왕의 뜻을 이어 무엇인가 해내려는 성상의 마음에 틀림없이 부응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한다면 신이 감히 믿지 못하겠지만, 요컨대 내리잡더라도 누구나
친근하고 싶어하는 선인임에는 틀림없고, 또 옛사람들 학문하는 요령을 이미 터득하였으며,
인자하고 진실하며 충성스럽고 알찬 마음씨는 이미 조야의 미쁨을 사고 있습니다."
권시의 상소는 양송에 대한 비꼼으로 시작되었다.
양송을 "선왕의 뜻을 이어 무엇인가 해내려는 성상의 마음에 틀림없이
부응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한다면 신이 감히 믿지 못하겠지만"이란 말은
양송이 북벌에는 정작 뜻이 없는 인물이라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도 3년복이 맞다는 데 가세했다.
"신이 언젠가 말했듯이, 대왕대비 복제가 당연히 3년이어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1백 세를 두고 질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애석하게도 시열. 준길. 유계가 그렇게 현자이면서도
당연히 3년으로 해야 한다는 그 사리를 사리지 못했기 때문에, 거리에서도 말들을 하고
시골 마을에서도 논의가 분분하여 마음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지 이미 오래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는 그 논의가 이미 조정 위에서 발발하였는데도 여러 사람들이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시열의 '선왕(효종)이 (인조의)서자가 되어 해로울 것 없다'는 말은
매우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말하는 자 없어,
그게 바로 선도의 참소를 부른 원인이 된 것입니다.
선도가 현자를 헐뜯고 시기한 점은 매우 나쁜 짓임에 틀림없으나, 자기 신상에 틀림없이
화가 닥치리라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한 점으로는,
역시 할 말은 하는 선비입니다. ...
조정 논의가 너무 과격하여 이 극한 상황까지 오게 되어 권세가 아래로 옮겨갔다는 참소를
사실화하고 말았으니, 까닭없이 선비를 죽인다는 그 말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선도는 일찌기 선왕의 용잠(임금이 되기 전의 사저)시절 사부였던 옛 은의가 있어,
비록 그가 착하지 못함을 아시고서도 그의 장점만을 취하여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하여
작위도 중대부에까지 이르렀으니, 가볍게 죽여서 안 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현종은 윤선도를 지원하는 이 상소에 대해 좋은 뜻으로 비답한 뒤 면대하여 유시하겠다는
유지를 내렸는데, 이는 현종도 권시의 말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권시가 윤선도를 구하고 나서자 서인의 예봉이 이번에는 권시에게 향해졌다.
대사간 이경억과 사헌부 장령 윤비경 등이 권시를 탄핵하고 홍문관의 유계 등이 가세했으며
사헌부 정언 권격은 권시를 파직하자고 청했다.
모든 대간들이 권시의 파직을 청하자 현종은 그 말을 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종은 권시를 아꼈다. 권시가 도성 밖으로 나가자 현종은 사관을 보내어 유시했다.
"이런 선비들이 자꾸 조정을 버리고 나가니 내 마음의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
지금 형편으로는 가지 않을 수 없겠지만 곧 마음을 돌려서 돌아오기 바란다."
이는 현종이 속마음으로는 3년설을 지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정원에서 유시의 환수를 거듭 청하여 권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현종은 승지를 가둔 후에야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수 있었다.
권시는 이처럼 윤선도를 옹호한 까닭에 서인의 공박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는 남인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는 서인 윤선거와 사돈사이였던 데다 윤휴와 허목의 공격을 당한 송시열이 조정을 떠나자
송시열을 만류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 권시는 송준길에게도 조정을 떠나는 것을 만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송시열과 송준길의 자존심으로 조정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조선의 관료들, 특히 유신들은 옳든 그르든 공박을 받으면 사직하고 떠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자신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면 옳든 그르든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하나의 관례였다. 송시열이 먼저 조정을 떠나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가 버렸고,
송준길도 창황히 조정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처벌을 요청했다.
물론 서인 정권 아래서 이들이 처벌당할 리 만무하므로 이는 관례에 따른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인은 실제적인 처벌을 당했다.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간 것을 비롯해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 허목은 지방관을 할 나이가 아니어서 이조에 정장해 부당한 인사조치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런 파문이 계속되자 우의정 원두표는 차자를 올려 현종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미 시행중인 1년복을 입든, 아니면 연제에 대왕대비가 길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상복을 입어 3년복을 입든 전하께서 결단하십시오."
현종이 예조에 하문해 유신들의 의견을 묻게 하자 서인 이유태는 양송과 같은 입장이라고 말했고,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심지원도 마찬가지였다. 영중추 정유성도 같은 견해였다.
"대왕대비의 복을 1년복으로 한 것은 예법에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선조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 문제를 제기했던 윤휴는 더 이상 적극적인 의결 개진을 하지 않고
현종의 뜻에 맡긴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것은 국가 대례로서 대소 제신들이 각기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저마다 논설이 있었으니, 오직 성상께서 가리시어 정할 일입니다.
다만 그게 인심과 관계가 밀접하고 대경과도 관계되는 일이니,
선왕의 예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골라 행하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현종은 결단을 내렸다.
"다수의 의논에 따라 결정하게 하라."
재론된 예송도 서인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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