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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부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7)
    역사이야기/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19. 7. 15. 11:20


    
    ■ 거론 자체가 금지되는 예송
    
    재론된 제1차 예송논쟁이 서인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남인은 여전히 1년복이 틀리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현종 2년(1661) 4월 심한 가뭄이 들자 현종은 죄인을 사면하고 내외에 널리 구언했다. 
    행 부사직 조경이 구언에 응해 상소를 올렸다.
    "전하께서 가뭄을 당하여 자기 몸을 낮추고 반성하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원통한 옥사를 다시 심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심에 윤선도만이 빠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선도의 죄는 무엇입니까. 선도의 죄라는 것은 적통. 종통 논읭 있어 
    효묘(효종)을 두둔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선도라는 사람은 물리치더라도 
    그 종통. 적통에 관한 말은 결코 버리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크게 결단하셔서 적통. 종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왕(효종)의 실록에 분명히 실어서 
    훗날 예법을 논하는 자로 하여금 다른 말을 못하게 하신다면, 
    하늘의 뜻인들 어찌 인정과 다르겠습니까. 
    신은 이 말이 세상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한 몸의 이해만을 생각해서 전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현종과 승정원은 이미 길복으로 갈아입은 자의대비의 복제가 
    또 다시 논란이 되자 곤혹스러웠다. 
    이미 결정난 사안을 다시 거론하는 것도 그렇고 임금의 적통과 종통 문제가 
    자꾸 현안이 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승지 남취익, 원만석 등이 승정원에서 조경을 규탄하고 나섰다.
    "조경의 상소는 윤선도를 위한 것입니다. 저 윤선도의 죄악으로 말하면 국인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통촉하신 것인데 조경이 감히 윤선도의 말이 
    옳다면서 아무 기탄없이 말했습니다. 문서의 출납을 담당한 저희들이 무턱대고 
    아뢸 수도 없지만 그 상소 내용의 시비와 사정을 전하께서 가리실 수 있을 것이므로 
    소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종은 더 이상 예송문제의 재론을 원치 않았다. 
    현종은 상소문을 도로 내주게 한 후 승정원에 하교를 내려 한탄했다.
    "아, 전 판중추 조경은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겼으니 어찌 지식이 없겠는가마는, 
    애석하게도 소장이 내용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도록 잘못되었던 말인가."
    심사에서 소를 돌려주는 것으로 끝낼 리가 없었다. 
    삼사가 곧 조경을 삭탈관직하여 시골로 추방할 것을 청하니 현종이 허락하는데, 
    서인 중진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강경대응은 또 다른 시비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의정 정태화는 경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경은 원래 시골에 살던 사람이니 시골로 추방한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 손해가 없고 나라의 체면만 손상될 것입니다."
    좌의정 심지원도 마찬가지였다.
    "조경은 세 조정의 원로대신인데 전하의 구언에 응하여 말하였다가 죄를 얻으면 
    이것이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젊은 서인이 포진한 삼사에서는 대신들이 조경을 두둔했다고 들고 일어서며 
    조경을 귀양보내야 한다고 탄했다. 
    현종은 한 달 이상 귀양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버텼다. 
    이런 와중에 효종의 2주기가 다가왔다. 
    제사에 참여해 곡배하기 위하여 서울에 온 송시열은 
    현종 2년 5월 임금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신은 뼛속까지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신이 시골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시열은 선왕이 태묘에 들어가는 것을 
    온당치 않게 생각한다'고 했다 하는데, 
    이 설이야말로 종통. 적통의 설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쓸데없이 그냥 개인적으로들 이야기하다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영상 정태화가 이를 듣고 크게 놀란 나머지 신의 아들과 서로 아는 사람을 불러 
    물어보았으므로 신의 아들이 이를 토해 신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긍익은 "연려신기술"에서 '양파시장'이란 글을 인용해 현종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신이 처음 사종지설을 말하니 정태화가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설은 인용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태화는 반대당의 모함이 있을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견지명을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사실 예송논쟁은 다산 정약용이 "의례주소" '가씨소'의 양면성을 말하면서 3년복으로도, 
    1년복으로도 의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 중 후한 예를 따라서 3년복으로 정했다면 
    아무 문제의 소지가 없었다. 송시열 등 서인들이 소현세자 일가의 억울함에 대한 신원을 
    당론으로 삼은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효종의 종통과 맞물린 민감한 문제였다. 
    효종의 종통 자체를 부인하고 인조반정 같은 쿠데타를 결심하지 않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박하게 의정한 것은 스스로 시비를 초래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국상을 기년복으로 정한 것은 반대당파인 남인의 시비를 자초한 
    격이었고, 사실 자의대비가 탈상한 후에도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현종 4년(1663)에 정6품 홍문관 수찬 홍우원이 또다시 윤선도와 남인을 옹호하며 
    올린 상소가 이런 상황을 말해준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은 자를 싫어하여 억지로 같이 만들려고 하는 형편이어서 
    사대부 사이에도 다른 의견이 생기면 반드시 함께 일어나 공격합니다. 
    윤선도는 변방 섬인 삼수에 안치되었다가 북청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대간이 반대하여 
    다시 삼수로 되돌려졌습니다. 허목이 예법에 관한 소를 두 번 올리니 먼 삼척으로 내쫓았습니다. 
    허목이 그만두고 돌아온 후에도 다시 찾아서 벼슬을 주지 않았으며, 권시는 중한 탄핵을 받았습니다. 
    또 조경이 선도를 구하려 하자 간사하다고 지목하면서 그 아들까지 영구히 벼슬을 주지 않는 벌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선도는 원래 기개있고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서 광해조 때에도 
    바른말하는 상소로 절개를 세웠으며 선왕조(효종)에는 사부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람 서리 찬 지역에 귀양가 백발 날리는 늙은 몸으로 언제 죽을지 모를 형편입니다. 
    만약 갑자기 죽어 버린다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누명을 남길까 두렵습니다."
    대간에서는 즉각 홍우원의 관직을 삭탈하고 시골로 추방할 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은 듣지 않았다. 
    현종은 선인의 세에 밀려 1년설로 정했지만 내심으로는 3년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 5년에 조경과 홍우원을 다시 서용한데서도 현종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재위6년 2월 현종은 윤선도를 고향 가까운 광양으로 유배지를 옮겨주면서 자신의 뜻에 반하여 
    금부에서 마음대로 안치했다고 꾸짖었다.
    현종은 단지 그 지역에 정배하라고 했을 뿐인데 멋대로 안치라고 써 넣어 
    집에서 꼼짝 못하도록 했다는 꾸짖음이었으니 여기에서도 윤선도에 대한 현종의 속마음이 엿보인다. 
    현종 7년(1666) 예송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이번 문제 제기는 서인 쪽에서 한 것이었으니 
    당초 기년복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분신한 서인 감상용의 손자 김수홍이 그 장본인이었다.
    "서자는 첩자라는 허목의 예론이 맞는 것 같으니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소현세자의 적통이란 것은 강빈의 옥사 때 이미 단절된 것 아닙니까?"
    강빈이 역적이니 그 자손이 어찌 적통을 이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었다. 
    이는 서인 내부의 분열이었으나 이런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세력은 역시 남인들이었다.
    같은 해 남인의 본거지인 영남 유생 유세철등 1,400여명이 연명으로 상소하고 나섰다. 
    이들은 송시열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상복고증"이란 책자를 함께 바쳤다. 책자의 내용은 
    윤선도의 말을 그대로 반복.부연설명한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예에 '천자와 제후의 상에는 모두 참최복을 입고 기년복은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예기" '증자문'의 "천자.제후의 상에는 모든 신하가 다 참최복을 입는다."는 내용을 뜻했다. 
    서인 승지 김수항은 승정원에 상소를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우려했다.
    "이 상소는 전하의 마음을 움직여서 선한 사람들을 모두 없애려는 것입니다."
    "문장과 의사가 들락날락하여 일정하지 않고 동쪽을 말하나 실상 그 뜻은 서쪽에 있으니 
    선비들 풍습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놀라운 일이다."
    이에 양사에서 소두 유세철 등을 죄줄 것을 청했으나 현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상 현종의 속마음은 자신의 아버지 효종을 높이는 남인에게 있으니 서인 정권 아래에서 
    이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상소는 물리치면서 처벌은 하지 않는 방법을 쓴 것이다. 
    남인 유생들이 상소하는데 서인 유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홍득우와 충청도의 서인 유생 윤택 등이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의 복제설이 바른데도 억울하게 반대당에게 배척당했습니다."
    현종은 이들의 상소를 우대하는 형식적 비답을 내렸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현종은 예송 자체를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결심했다. 
    예론으로 해가 저물고 달이 기우는 것은 나라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현종은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근래에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대하여 죄를 논하여 처벌하고 싶지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음날 분쟁의 폐단만 될 것 같으니 일정한 제도를 천백 년이 가도록 
    그대로 준행하는 것만 못할 것 같다. 기해년 국상 때 "국조오례의"에 따라 
    상복을 시행했는데, 지금 와서 무슨 고칠 일이 있겠는가. 
    차후에 다시 예론을 논하는 상소가 있으면 비록 많은 선비들의 상소라 해도 
    용서하지 않고 중형으로 다스리겠다. 이 뜻을 널리 중외에 알리라."
    현종이 이처럼 강경한 태도를 취하자 
    이때부터 예론은 거론할 수 없는 금법이 되었다. 
    서인은 이로써 예송논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예송논쟁은 지하에 잠복한 불씨일 뿐이었다. 
    자연적으로 보아도 당사자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1624년생)는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1618년생)보다 여섯 살이 어렸으므로 
    며느리의 상사때 시어머니의 복제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같은 성격의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상황은 실제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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