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Johannes Brahms, 1833∼1897
Takako Nishizaki : Violin
Slovak Philharmonik Orchestra / Stephen Gunzenhauser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77은 그의 유일한 이 장르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브람스의 최대 걸작의 하나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고금을 통틀어서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더불어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역사적인 명곡이다.
악곡의 구조는 베토벤의 협주곡과 많은 점에서 닮아있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처럼 여기에서도 브람스는 고전주의적 형식미를 중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베토벤을 의식한 것으로 보아지며,
또한 조성이 베토벤과 같은 D장조라는 것과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정서가 풍부한 것도 아주 유사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작품은 제1악장 서두에 나오는
제1주제의 견실한 맛이라든지, 그에 이어지는 중후하고 풍요로운 음악성은
다른 작곡가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브람스만의 개성으로 평가된다.
1877년 9월에 브람스는 바덴바덴에서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의 연주를 들었다. 그리고 그 연주에서 얻은 감명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게 된 직접 동기가 되었다.
작곡에 착수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피서를 겸해
투창에 머물던 1878년 7 월경이었다.
그리고 8월에는 4악장으로 되는 협주곡의 구상이 완료되었다.
8월 21일, 요아힘에게 제1악장의 독주 바이올린 파트를 보내어
그의 의견을 구했다. 요아힘에게서는 이런 회답이 왔다.
"당신이 4악장의 협주곡을 쓰고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보내준 독주 파트는 면밀히 조사해서 몇 군데 수정해 봤습니다만,
전체 스코어를 보기 전에는 분명한 의견을 말할수 없을것 같습니다."
브람스는 처음에는 교향곡처럼 4악장으로 구성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11월에 브레슬라우에서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간 의 2개 악장은 삭제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지요. 그 대신에 조용한 아다지오를 썼습니다."
브람스는 요아힘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면서 바이올린 파트를
여러 가지로 수정했다. 기교에서 너무 어려운 대목에서 요아힘은
"나처럼 손이 큰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람스는 요아힘의 충고를 그대로 채용하지는 않았고,
요아힘은 브람스의 그와 같은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요아힘은 브람스의 지나친 신중성에 안달을 하면서
이듬해인 1879년 1월 1일에 초연하기로 날짜를 스스로 정해 놓고,
그에 맞추어 작곡을 서둘러 줄 것을 거듭 브람스에게 독촉했다.
그리고 손수 카덴짜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초연은 예정한 날짜에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있었는데,
요아힘이 독주를 맡고 브람스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연습이 충분치는 않았지만 결과는 성공이었고 좋은 평도 받았다.
그 성공에 고무된 요아힘은 런던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이 작품을 연주했고
자기의 주된 레퍼토리로 삼았다.
관현악 부분을 피아노로 편곡한 악보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클라라 슈만에게 보내어져서 그곳에서 클라라의 피아노와
요아힘의 수제자 후고 헤르만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작곡 과정에서 많은 의견을 주었던 친구 요아힘에게 헌정되었다
-----------------------------------
지휘자 요제프 헬메스베르거(Joseph Hellmesberger, 1855~1907)는
이 곡을 ‘바이올린을 위해서’ 쓴 곡이 아니라 ‘바이올린을 거스르며’
쓴 곡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부분이 거의 교향곡처럼 탄탄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교에 능했던 요아힘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만큼
옥타브가 넘어가는 큰 음정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연주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반면에
독주부가 화려한 것은 아니라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티는 별로 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화려함을 좋아하는 사라사테와 같은 연주자는
이 곡에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고 하며,
한동안은 연주자들에게 외면을 받는 곡으로 남았다.
190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유수의 연주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