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묘한 棋理 깨우쳐 八道 호령한 진정한 프로기사
조선시대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갖고 있는 통념 하나.
양반 사대부는 독서와 정치에 몰두하며, 여자들은 집에 들어앉아 살림하고,
그들이 읽는 책은 사서삼경, 그들의 학문은 주자학뿐이며,
직업이래야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통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나 500년간 한결같을 수는 없다.
조선후기엔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하고 새로운 지식과 취미, 경험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을 통해 정형화된 사회와 학문, 이념, 인생을 벗어던지고
열정적으로 새 길을 개척한 조선후기 인간승리를 엿볼 수 있다.
한국 바둑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동호인 수억 명을 거느린 바둑 최강국으로 한·중·일 삼국이 벌이는 각종 기전(棋戰)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인터넷 바둑 사이트의 기술이나 운영도 세계 최고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바둑 애호가와 쟁쟁한 고수가 많다.
현재의 수준은 바로 조선시대와 긴밀히 연결되는데, 과연 그 시절 바둑판은 어땠을까.
또 그 시대에 명성을 한 손에 쥔 기사는 누구일까.
조선사회는 바둑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저 여기(餘技), 소기(小技)로 간주하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 보니 조선 500년을 통해 국수(國手)로 불린 사람은 많지 않다.
국수가 있었지만 굳이 그 이름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국수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접어들면 그런 관행이 바뀌어 바둑과 국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높아진다.
바둑에 대한 대접이 달라진 것은 이른바 국수에 대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나 받을 수 있는
전(傳)을 써준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국수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 후기다.
국수의 인명을 제법 많이 기록한 책으로 장지연의 ‘일사유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현종·숙종 연간에
활동한 덕원군과 유찬홍, 윤홍임 같은 국수가 소개됐고, 그 뒤로 최북, 지석관(池錫觀), 이필(李馝),
김종귀, 김한흥, 고동, 이학술이 나온다.
근대의 국수로는 지우연(池遇淵), 김만수(金萬秀) 등이 거론된다.
이외에 이런저런 자료에 산발적으로 국수가 등장한다.
국수 이야기는 바둑 그 자체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바둑의 속성이 승부를 겨루는 것이므로
이기고 지는 판가름의 긴장이라든지, 수 읽기의 오묘함 등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요소가 충분했다.
판세를 일거에 뒤집은 역전의 드라마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 가운데 당대 최고수의 자리를 두고 바둑계 고수들이 벌인 쟁투는
단연 화젯거리였다.
유명한 승부는 뒷날 전기나 야담에 기록돼 하나의 전설이 됐다.
특히 야담에는 조선 제일의 국수가 무명의 신진 기사에게
무참하게 진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흔치 않은 사건이 주는
충격과 흥미로움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냈기 때문이리라.
이런 사건의 서술 속에 조선시대 바둑계의 실상과 국수의 계보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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