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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7
    옛 이야기/조선의 뒷마당 2019. 5. 6. 13:10



    
    ■ 조선은 극단적 ‘남성 양반’ 중심체제 
    
    조선시대는 극단적 ‘남성 양반’ 중심체제였다. 
    남성중심주의는 일부일처제를 넘어 남성의 성욕을 충족시킬 수단을 제도화했다. 
    즉 축첩제와 기녀제는 남성의 성욕을 무한대로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였던 것이다. 
    여성의 음행을 비판하면서도 양반관료들은 조건이 허락하는 한 축첩했고, 기녀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어우동을 사형시킨 성종은 왕비 3명(폐비 윤씨 포함), 후궁 10명을 두고 있었다. 
    후궁은 본질적으로 왕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였다. 
    양반들의 축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축첩제도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축첩제도에서 ‘서얼(庶孼)’이 태어났고, 이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서얼차대’ 현상이 
    발생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감동과 어우동을 낳은 것은 남성의 성적 욕망이었으나, 감동과 어우동은 다시 남성에 의해 단죄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종에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성적 향락을 왕에게로 독점시켰다. 
    성종대의 궁중과 사대부들은 소비와 향락에 들떠 있었다. 
    연산군의 방종은 퇴폐적 향락분위기의 연장이었으나 연산군은 그러한 향락을 독점하려 하였기에 
    사대부들에 의해 축출되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조광조(趙光祖)가 이끄는 기묘사림이 등장하여 도덕주의 정치를 표방하면서 
    이러한 지배층의 퇴폐문화를 단속하려 했다. 예컨대 조광조 세력은 기생제도를 폐지시켰다. 
    하지만 훈구세력의 반발로 기묘사림이 축출되면서 가장 먼저 부활한 것이 바로 기생제도였다. 
    선조 때부터 기묘사림의 후예인 사림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일은 
    성적 문제와 관련된 사건들이 이 시기부터 왕조실록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내(이언인)가 일찍이 허벅지에 종기가 나서 누워 있는데, 구씨가 와서 아픈 곳을 묻고 
    인하여 종기를 문지르면서 음욕(淫慾)의 빛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또 와서 종기를 만지다가 드디어 음근(陰根)에 미치기에 내가 발로 찼습니다. 
    그 뒤 내 병이 나은 어느 날 어두운 밤중에 구씨가 나를 불러 
    밀과(蜜果)를 주어 먹게 하고 인하여 침방(寢房)으로 끌고 들어가서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어우동이 되어 죽더라도 정욕을 참을 수 없다’고 하므로 
    드디어 간음하였고, 그 뒤에는 매양 틈을 타서 간음하였습니다. 
    하루는 구씨가 내게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월경이 없으니, 
    아마도 임신한 것 같다’ 하므로, 
    내가 그 말을 듣고 곧 고향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성종 17년 1월22일. 덕성군(德城君)의 처 구씨가 
    조카 이인언(李仁彦)과 간통한 내막을 보고한 내용의 일부). 
    중종 이후엔 성에 관련된 사건들이 실록에서 없어졌다. 
    그러나 축첩제와 기생제도는 중종 이후에도 계속됐고, 
    조광조와 같은 개혁 세력들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했으며 
    조선 중·후기 세도정치의 과정에서 부정부패와 퇴폐행위가 만연했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볼 때 중종 이후 성 문제와 관련된 사건이 지배계층 
    내부에서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거나 그 발생건수가 현격히 줄었기 때문에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결국 현상은 그대로인데 
    현상 자체를 더 이상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 중·후기는 성 담론을 추방함으로써 
    ‘양반의 성’에 더욱 위선적인 이미지를 덧씌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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